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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백제 왕조 계보

고이왕[ 古爾王 ]

by 1티어 율쌤 2022.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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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왕[ 古爾王 ] 

 

성은 부여(扶餘)이며, 한자 표기가 《삼국사기》에는 ‘古尒王(고이왕)’, 《삼국유사》에는 ‘古爾王(고이왕)’으로 되어 있다. 백제의 제4대 왕인 개루왕(蓋婁王, 재위 128∼166)의 둘째아들이며 제5대 초고왕(肖古王, 재위 166∼214)의 동복아우로 전해진다. 그러나 개루왕과 고이왕의 연대 차이로 볼 때 부자(父子) 관계라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234년(구수왕 21) 구수왕(仇首王, 재위 214∼234)이 죽고 그의 맏아들인 사반왕(沙伴王)이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잘 처리하지 못해 곧바로 폐위되고 고이왕이 그를 대신해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에도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사반왕이 나이가 어려 왕위에 오른 뒤 곧바로 폐위되고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낙초(樂初) 2년 기미(己未)에 사반왕이 죽자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 구절에 관해 ‘낙초(樂初)’가 중국 위나라의 연호인 ‘경초(景初, 237~239)’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고 경초 2년인 238년으로 해석하는 학설도 있고, ‘낙초’를 백제의 고유한 연호로 보고 기미년인 239년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왕위에 오른 고이왕은 240년(고이왕 7) 신라의 서쪽 변경을 공격하고, 진충(眞忠)을 좌장(左將)으로 임명해 군사에 관한 업무를 맡겼다. 242년에는 백성들에게 명하여 남쪽의 소택지(沼澤地)에 논을 개간하게 했고, 숙부인 부여질(夫餘質)을 우보(右輔)로 삼았다. 246년에는 위나라의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 유무(劉茂),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하자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의 변방을 기습해 주민들을 잡아왔다. 그러나 낙랑의 유무가 분노해 백제를 공격하려 하자 주민들을 돌려보냈다. 247년에는 진충을 우보로 임명하고 진물(眞勿)을 좌장으로 삼아 군사 업무를 맡겼다.

248년에는 봄부터 여름까지 가뭄이 들어 겨울에 굶주리는 백성들이 많이 발생하자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하고 1년 동안 조세를 면제시켰다. 255년(고이왕 22)에는 군대를 보내 신라를 공격해 괴곡(槐谷) 서쪽에서 신라의 장수인 일벌찬(一伐湌) 익종(翊宗)을 죽이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백제는 봉산성(烽山城)도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258년(고이왕 25)에는 말갈의 부족장인 나갈(羅渴)이 좋은 말 10필과 함께 보내오자,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여 돌려보냈다.

260년(고이왕 27) 봄에 관직 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해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6좌평(六佐平)을 두어 내신좌평(內臣佐平)은 왕명의 출납에 관한 일, 내두좌평(內頭佐平)은 국가 재정에 관한 일, 내법좌평(內法佐平)은 예법과 의식에 관한 일, 위사좌평(衛士佐平)은 왕궁과 수도의 호위와 군사에 관한 일, 조정좌평(朝廷佐平)은 형벌과 송사에 관한 일, 병관좌평(兵官佐平)은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관장하게 했다. 그리고 관직을 16품으로 나누었는데, 좌평은 1품, 달솔(達率)은 2품, 은솔(恩率)은 3품, 덕솔(德率)은 4품, 한솔(扞率)은 5품, 나솔(奈率)은 6품, 장덕(將德)은 7품, 시덕(施德)은 8품, 고덕(固德)은 9품, 계덕(季德)은 10품, 대덕(對德)은 11품, 문독(文督)은 12품, 무독(武督)은 13품, 좌군(佐軍)은 14품, 진무(振武)는 15품, 극우(克虞)는 16품으로 했다. 그리고 관리의 복색도 제정하여 6품 이상은 자색 옷을 입고 은으로 만든 꽃으로 관을 장식하게 했으며, 11품 이상은 비색 옷, 16품 이상은 청색 옷을 입게 했다. 또한 동생인 우수(優壽)를 내신좌평으로 임명했다. 261년 고이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신라의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재위 247∼261)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62년(고이왕 29)에는 관리로서 뇌물을 받거나 도적질을 한 자는 그 세 배를 변상하게 했으며, 종신토록 금고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66년에는 군대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했으나 봉산성주 직선(直宣)에게 패하고 물러났다. 고이왕은 272년에도 다시 군대를 보내 신라를 공격했으며, 278년에도 신라의 괴곡성(槐谷城)을 공격했다. 신라의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재위 262∼284)은 파진찬(彼珍湌) 정원(正源)을 보내 포위된 괴곡성을 구했다. 백제는 283년(고이왕 50)에도 다시 괴곡성을 공격했으나 신라는 일길찬 양질(良質)을 원병으로 보내 백제의 공격을 물리쳤다. 신라의 미추이사금은 284년(고이왕 51) 봄에 서쪽 변경의 여러 성들을 직접 돌아보며 백제에 대한 방어 체제를 점검했다.

고이왕은 286년(고이왕 53)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 다시 화친을 청했다. 신라의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재위 284∼298)이 화친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그 뒤 4세기 후반까지 신라와 백제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고이왕은 왕위에 오른 지 53년째인 286년 겨울에 사망했으며, 아들인 책계왕(責稽王)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장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왕릉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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