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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역사와 인물

과전법 [ 科田法 ]

by 1티어 율쌤 2022.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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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전법
[ 科田法 ]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이 주도해 1391년(공양왕 3)에 실시한 토지제도로 조선 초기 양반관료사회의 경제 기반을 이루었다.

고려 말기에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 등 개혁파 사대부들이 사전(私田)의 폐단을 없애고 새로운 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1391년(공양왕 3)에 제정한 토지제도이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계승되어 1556년(명종 11) 직전법(職田法)을 폐지하고 녹봉제(祿俸制)를 실시할 때까지 조선의 양반관료사회를 유지하는 제도적 기초가 되었다.

과전법도 고려의 전시과(田柴科)와 마찬가지로 농민에게 전조(田租)를 거둘 수 있는 수조권(收租權)을 국가기관이나 관리 등에게 직역에 따라 나누어주는 수조권 분급제도를 근간으로 한다. 그러나 땔감을 구하기 위한 시지(柴地)도 함께 지급했던 전시과와는 달리 전지만 지급했으며, 개인에게 지급하는 사전의 설정지역을 경기도로 제한했다. 그리고 농민이 수조권자에게 수확량의 50%를 내던 병작반수제(竝作半收制)를 금지하고, 논은 현미 30말, 밭은 잡곡 30말을 최고한도로 해서 수확량의 10분의 1만 전조로 받을 수 있게 했다. 아울러 수조권을 빙자해 농민의 농지를 빼앗지 못하도록 규정해서 농민의 권리에 대한 보호책을 강화했다. 사전의 수조권자도 받은 전조에서 1결당 논은 백미(白米) 1말, 밭은 황두(黃豆) 2말씩을 다시 국가에 전세로 납부하게 했는데, 이는 사전도 국가가 최종 수취권을 지니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고려의 전시과 제도는 976년에 처음 실시된 뒤 998년의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1076년의 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 등으로 정비되었다. 하지만 1170년 무신정권이 성립된 뒤 권력자들이 불법적으로 수조지를 늘리고, 토지를 빼앗아 농장을 설치하면서 붕괴되었다. 행정체계가 문란해지면서 하나의 토지에 여러 명의 전주들이 수조권을 행사해 농민을 수탈했고, 이 과정에서 토지의 소유권마저 빼앗아버리는 일도 자주 발생했다. 권문세가가 농지수탈과 토지겸병을 확대하면서 신진관료들은 수조지를 지급받지 못했고 국가재정도 크게 부족해졌다. 이러한 전제(田制)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공민왕 때에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해 권문세족의 토지겸병을 억제하고 농장을 몰수하려 했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처럼 고려 말기에는 전시과 체제가 붕괴되면서 토지제도의 문란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나타나고 있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와 개혁파 사대부들은 토지제도를 개혁해 국가재정을 확충하고, 농민에 대한 무질서한 수탈을 제한하며,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권문세족들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신진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려 했다. 그래서 1388년에 남부의 6도에서 양전(量田) 사업을 벌여 경기를 비롯한 6개의 도에서 실전(實田) 62만 3천여 결(結), 황원전(荒遠田) 17만 5천여 결의 수조지를 확보했다. 이를 기반으로 1390년에는 공·사의 전적(田籍)을 소각했고, 1391년 음력 5월에 과전법을 실시했다.

과전법도 전시과와 마찬가지로 전국의 토지를 국가수조지로 파악하고 국가기구와 직역자 등에게 수조권을 분급한 것으로, 토지를 개인이 수조권을 지닌 사전(私田)과 왕실이나 국가가 수조권을 지닌 공전(公田)으로 구분했다.

사전은 분급의 명목에 따라 과전(科田)·군전(軍田)·공신전(功臣田)·외역전(外役田) 등으로 나뉜다. 과전은 현직 관리, 서울에 거주하는 전직 관리들을 품계에 따라 18과(科)로 구분해 10결에서 150결까지 차등을 두어 지급했다. 원칙상 세습을 허용하지 않아 죽은 뒤에는 국가에 반환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미망인과 미성년 자녀에게 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의 명목으로 지급되어 실질적으로는 세습되었다. 군전은 지방의 한량관리(閑良官吏)에게 품계에 관계없이 5결이나 10결의 지급한 수조지이다. 공신전은 공신으로 책봉된 자들에게 지급한 수조지로 세습이 인정되었을 뿐 아니라 전세도 면제되었다. 외역전은 향리와 특수직역에 종사하는 자들에게 지급한 수조지이다.

공전은 국가 재정을 위한 수조지로 왕실수조지와 국가수조지로 나뉜다. 왕실 창고에 지급된 창고전(倉庫田), 왕실과 왕궁에 지급된 궁사전(宮司田)과 능침전(陵寢田), 관아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분급된 공해전(公廨田), 성균관이나 향교 등에 분급된 학전(學田), 왕릉 수호를 위한 경비로 지급된 수릉군전(守陵軍田), 각 도의 역에 지급된 역전(驛田) 등이 있었다.


 
과전법은 토지 소유의 불균형 자체를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 수조권 분급제도를 정비해 양반관료체제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되었다. 따라서 농민의 부담이 줄어들기도 했지만, 사전(私田)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수조권자가 농민에게 과도하게 수취하는 문제가 끊이지 않았고, 수신전과 휼양전 등의 명목으로 과전이 세습되고 공신이 증가하면서 수조지가 부족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국가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사전의 지급을 경기도로 한정했으므로 수조지의 부족과 수급의 불균형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과전법이 처음 시행되었을 때에도 이미 과전을 부족하게 지급받거나 아예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과전법은 시행된 지 70여 년이 지난 1466년(세조 12)에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지를 지급하는 직전제(職田制)로 바뀌었고, 1470년에는 관아에서 전조를 직접 거둬서 수조권자에게 지급하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1556년에 직전법을 폐지하고 녹봉제를 실시하면서 수조권 분급제도에 기초한 과전법 체제는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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