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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신라 왕조 계보

내물마립간[ 奈勿麻立干 ]

by 1티어 율쌤 2022.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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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물마립간[ 奈勿麻立干 ] 

신라의 제17대 왕 (재위 356~402).

성은 김(金), 이름[諱]는 내물(奈勿)이며, 나밀(那密)이라고도 한다. 왕호(王號)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이사금(尼師今),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마립간(麻立干)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마립간의 칭호를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재위 417~458)부터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재위 500~514)까지 4대에 걸쳐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내물마립간부터 지증마립간까지 6대에 걸쳐 사용했다고 되어 있다. 중국의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수록된 《진서(秦書)》에는 신라왕(新羅王) 누한(樓寒)이 전진(前秦)에 위두(衛頭)를 사신으로 보내왔다는 내용이 전해지는데,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 내물마립간 26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누한(樓寒)’을 왕의 이름이 아니라 마립간을 이두식 한자로 나타낸 것으로 보고, 내물왕의 시대부터 마립간을 왕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해석한다. 한편, 《진서(秦書)》에서의 내물마립간에 관한 그 내용은 중국의 사서에서 신라의 왕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내물마립간은 제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재위 262∼284)의 동생인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휴례부인(休禮夫人) 김씨(金氏)이다.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조부인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이 아버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물마립간은 미추이사금의 딸인 보반부인[保反夫人, 내례길포부인(內禮吉怖夫人)] 김씨(金氏)와 결혼해 눌지마립간과 미사흔(未斯欣), 복호(卜好) 등을 낳았다.

내물마립간은 356년(흘해 47) 여름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재위 310~356)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했다. 흘해이사금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내물마립간이 왕위를 물려받은 것인데, 이때부터 제52대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까지 김씨(金氏)가 신라의 왕위를 이었다. 제13대 미추이사금이 김씨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재위 284~298)부터 흘해이사금까지 3대에 걸쳐 석씨(昔氏)가 다시 왕위를 차지했으므로, 신라의 김씨 왕조는 실질적으로 내물마립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내물마립간의 시기에는 왜인들이 자주 신라를 침범했다. 왜인들은 364년(내물 9)에 대규모 침공을 해왔으며, 393년(내물 38)에도 금성을 5일 동안이나 포위하기도 했다. 백제와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373년(내물 18)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300여명을 이끌고 신라로 투항해오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당시 백제는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이 마한(馬韓)을 정복하고 평양성을 공격해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을 전사시키는 등 세력을 크게 확대하고 있었으므로, 신라는 고구려와 중국의 전진(前秦) 등과의 외교를 통해 이를 견제하려 했다. 381년(내물 26) 왕은 위두(衛頭)를 전진에 사절로 보냈으며, 392년(내물 37)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오자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인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395년(내물 40)에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공해오자 실직(悉直)에서 그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내물마립간 때 신라에는 천재지변도 자주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66년(내물 11) 여름에는 곳곳에서 산사태가 일어날 정도로 큰 비가 내렸고, 372년(내물 17)에는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유랑자가 많아지자 왕은 사신을 보내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했다. 381년(내물 26)에도 여름까지 가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이 많이 발생했으며, 388년(내물 33)에는 금성에 여러 차례 지진이 발생했다. 이듬해에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메뚜기 떼의 피해로 흉년이 들었다. 397년(내물 42)에도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창궐했다.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자 왕은 1년 동안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399년(내물 44)에도 매뚜기 떼가 창궐했으며, 401년(내물 46)에는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내물마립간은 402년(내물 47) 봄에 죽었는데, 그의 아들들이 아직 어렸으므로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돌아온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 402~417)이 왕위를 이었다. 《삼국유사》에는 내물마립간의 능이 점성대(占星臺) 서남쪽에 있다고 나온다. 현재 경주시 교동의 동부사적지대(東部史蹟地帶) 안에 위치한 내물왕릉이 사적 188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황남대총(皇南大塚)을 내물왕릉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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