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지마립간[ 訥祗王 ]
요약 신라의 제19대 왕 (재위 417~458).
성은 김(金), 이름[諱]은 눌지(訥祗)이며 왕호(王號)는 마립간(麻立干)이다. 《삼국유사》에는 내지왕(內只王)이라고도 한다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에는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맨 처음 사용한 왕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 때부터 그러한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내물마립간의 적장자(嫡長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제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재위 262∼284)의 딸인 보반부인(保反夫人) 김씨(金氏)[내례길포부인(內禮吉怖夫人)이나 내례희부인(內禮希夫人)이라고도 한다]이다.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 402~417)의 딸인 아로부인[阿老夫人, 차로부인(次老夫人)이라고도 한다] 김씨와 결혼해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재위 458~479)과 조생부인(鳥生夫人) 김씨 등을 낳았다. 조생부인은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오생부인(烏生夫人)’으로 되어 있는데,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과 결혼해 제22대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을 낳았다.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은 내물마립간의 태자였으나 402년(내물 47) 내물마립간의 죽었을 때 아직 어렸기 때문에 당숙(堂叔)인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 402~417)이 그를 대신해 왕위를 물려받았다. 실성마립간은 내물마립간의 아들들인 미사흔(未斯欣)과 복호(卜好)를 왜(倭)와 고구려(高句麗)에 인질로 보내고, 눌지마립간마저 고구려인을 시켜 죽이려 했다. 하지만 고구려인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미리 알게 된 눌지마립간은 오히려 실성마립간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병사들이 실성마립간을 죽이고 눌지마립간을 왕으로 세운 뒤에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417년(실성 16) 왕위에 오른 눌지마립간은 나마(奈麻) 박제상(朴堤上,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되어 있다)을 시켜 왜와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 있던 동생들인 미사흔과 복호가 다시 신라로 돌아올 수 있게 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때 눌지마립간이 동생들을 다시 만난 기쁨을 표현해 ‘우식곡(憂息曲)’이라는 향악(鄕樂)을 지었다고 한다.
눌지마립간은 424년(눌지 8) 고구려로 사신을 보내 수교하는 등 초기에는 전대(前代)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433년(눌지 17) 백제와 화친을 한 뒤로는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를 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450년(눌지 34) 실직(悉直)에서 사냥을 하던 고구려 장수를 하슬라성(何瑟羅城)의 성주인 삼직(三直)이 군대를 보내 죽이는 일이 발생하자 고구려군이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공하는 일이 벌어졌다. 고구려군은 눌지마립간이 사과를 한 뒤에 물러났지만, 454년(눌지 38)에 다시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해왔다. 455년(눌지 39)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자 눌지마립간은 백제에 원병을 보내기도 했다.
눌지마립간 때에는 왜인들의 침략도 자주 발생했다. 431년(눌지 15) 왜인들은 신라의 동쪽 변경을 침공해 명활성(明活城)을 포위해 공격하다가 물러났다. 440년(눌지 25)에도 왜인들은 신라의 남쪽과 동쪽 변경으로 쳐들어와 약탈을 자행했으며, 443년(눌지 28)에는 금성을 10일 동안이나 에워싸고 공격하기도 했다. 당시 눌지마립간은 식량이 떨어져 퇴각하는 왜인들을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추격했다가 독산(獨山) 부근에서 왜인들에게 패해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천재지변도 자주 발생했다. 420년(눌지 4)에는 초가을에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는 바람에 자손을 내다파는 자가 나올 정도로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다. 431년(눌지 15)에도 초가을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큰 피해가 생겨 이듬해 봄에는 사람들이 소나무껍질을 벗겨 먹을 정도로 식량이 부족했다. 435년(눌지 19) 봄에는 나무가 뽑힐 정도로 큰 태풍이 불었으며, 436년(눌지 20)에는 여름에 우박이 내렸다. 438년(눌지 22)에는 홍수로 민가의 피해가 컸으며, 태풍과 우박 피해도 입었다. 453년(눌지 37)에는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고, 이듬해에는 초가을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농작물 피해가 컸다. 457년(눌지 41)에도 태풍과 서리 때문에 피해를 입었으며, 458년(눌지 42)에는 금성의 남문이 무너질 정도로 큰 지진이 일어났다. 한편, 눌지마립간은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429년(눌지 13) 시제(矢堤)를 쌓았는데 그 둑의 길이가 2,170보나 되었다. 438년(눌지 22)에는 소달구지(牛車)의 사용법을 백성들에게 보급했다.
눌지마립간이 458년(눌지 42) 가을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맏아들인 자비마립간이 왕위를 계승했다. 이때부터 신라에서는 아들이 없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장자상속제(長子相續制)가 확립되어 왕권이 강화된 모습을 나타냈다.
한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모두 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에서 묵호자(墨胡子)라는 승려가 건너와 신라에 불교를 전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묵호자는 일선군(一善郡)의 모례(毛禮)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렀는데, 중국의 양(梁)나라에서 사신이 가져온 향의 용도를 알려주었을 뿐 아니라, 그 향을 태워 공주의 병을 낫게 하고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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