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왕[ 東城王 ]
성은 부여(扶餘), 이름은 모대(牟大), 시호는 동성(東城)이다. 이름을 따서 모대왕(牟大王)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이름이 마모(摩牟)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마제(麻帝)나 여대(餘大)라고도 한다고 되어 있다. 백제의 제22대 문주왕(文周王, 재위 475∼477)의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로, 제23대 삼근왕(三斤王)의 사촌이다. 생모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며, 둘째아들인 사마(斯摩)는 제25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이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동성왕(東城王)이 담력이 셌으며 활을 백발백중으로 잘 쏘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근왕이 479년(삼근왕 3) 겨울에 15세의 나이로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에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긴 직후였으므로 왕권이 크게 약화되고 병관좌평(兵官佐平)인 해구(解仇)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고 있었다.
해구의 반란이 진압된 뒤에 왕위에 오른 동성왕은 482년 진로(眞老)를 병관좌평으로 임명해 안팎의 군사에 관한 업무를 맡겼다. 이 해 말갈이 한산성(漢山城)을 함락시켜 3백여 호의 백성을 붙잡아가자, 동성왕은 이듬해 직접 한산성으로 가서 병사들과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동성왕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484년(동성왕 6)에는 중국의 남제(南齊)로, 485년(동성왕 7)에는 신라로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다. 486년(동성왕 8)에는 백가(苩加)를 위사좌평(衛士佐平)으로 임명했으며, 궁궐을 중수하고 우두성(牛頭城)을 쌓았다. 그리고 겨울에는 대궐 남쪽에서 대규모로 군대를 사열했다. 488년에는 중국의 북위(北魏)가 쳐들어오기도 했으나 이를 물리쳤다.
490년 북부(北部)의 15세 이상 사람들을 징발해 사현성(沙峴城)과 이산성(耳山城)을 쌓았으며, 연돌(燕突)을 달솔(達率)로 삼았다. 493년에는 신라와의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재위 479~500)에게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했다. 그러자 신라는 이찬 비지(比智)의 딸을 보내왔다. 494년(동성왕 16) 살수(薩水) 유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고구려 군대에 패한 신라의 병력이 견아성(犬牙城)에서 포위되자 동성왕은 3천의 군대를 보내 신라를 도왔다.
495년(동성왕 17)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공격해오자 동성왕은 신라에 원병을 요청했고, 신라의 소지마립간은 장군 덕지(德智)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백제를 돕게 했다. 497년(동성왕 19)에는 병관좌평 진로가 죽자 달솔 연돌을 병관좌평으로 임명했다. 498년(동성왕 20)에는 사정성(沙井城)을 쌓아 한솔(扞率) 비타(毗陁)로 하여금 지키게 했으며, 탐라(耽羅)에서 공물과 조세를 내지 않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무진주(武珍州)까지 갔으나 탐라가 사신을 보내 사죄의 뜻을 전해오자 원정을 중단했다. 이처럼 동성왕은 신라와의 동맹을 기초로 국방체제를 정비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막아냈으며, 웅진 천도 이후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동성왕은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498년 웅진교(熊津橋)를 세우고, 500년(동성왕 22)에는 대궐 동쪽에 높이가 5장(丈)이나 되는 임류각(臨流閣)을 세우는 등 토목사업을 잇달아 벌였으며, 연못을 파고 기이한 새를 기르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간관(諫官)들이 이를 항의하는 글을 올렸으나 듣지 않고 대궐 문을 닫아 언로(言路)를 막아버렸다. 게다가 백제에는 이즈음 자연재해가 잇달아 발생해 백성들의 삶이 무척 피폐해졌다. 497년(동성왕 19) 여름에는 홍수로 수많은 집들이 유실되는 피해가 발생했고, 499년에는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겨울에는 전염병도 창궐했다. 이렇듯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자 신하들은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자고 했으나 동성왕은 이를 듣지 않았다. 그래서 한산(漢山)에서는 2천여 명이 고구려로 넘어가기도 했다. 501년 봄에도 서리가 내려 보리농사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여름부터 가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 피해가 컸다.
이처럼 동성왕은 대규모 토목사업과 거듭된 자연재해로 점차 민심을 잃었다. 501년에는 웅진성에서 노파가 여우로 둔갑해서 사라지는 변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동성왕은 그 해에 가림성(加林城)을 쌓고 위사좌평인 백가로 하여금 그곳으로 가서 지키게 했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백가는 그해 겨울 사냥에 나선 동성왕을 자객을 시켜 죽이고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동성왕이 죽은 뒤 둘째아들인 무령왕이 왕위를 이었다. 그는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우두성(牛頭城)으로 가서 한솔(扞率) 해명(解明)을 시켜 가림성을 공격하게 해서 백가의 반란을 진압했다. 동성왕의 장례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왕릉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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