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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

산미증식계획[ 産米增殖計畵 ]

by 1티어 율쌤 2022. 2. 14.

산미증식계획[ 産米增殖計畵 ]

 

일제가 조선을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1920∼1934년 실시한 농업정책.

일본자본주의의 존립에 필수적인 저임금 유지를 위한 미가정책 ·식량대책이자 조선을 식량 공급기지로 만들려는 식민지 농업정책이었다.

제1기 계획은 1920년∼1925년, 제2기 계획은 1926년∼1934년 두 차례에 걸쳐 시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서는 자본의 급속한 축적으로 말미암아 농민의 대량 이농과 도시 노동자의 급증이라는 사회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일시적으로 식량수급을 악화시켜 1918년에는 ‘쌀소동[米騷動]’이 발생하였다. 이에 일제는 조선에서의 식량증산을 강행하여 식량의 안정된 공급을 확보함으로써 자국의 식량 부족을 해결하려 하였으며, 이러한 방침에 따라 입안, 실시된 것이 산미증식계획이었다.

총독부는 처음에는 30년 계획으로 총 80만 정보의 토지개량을 계획하고, 먼저 1차로 15년 동안에 총공사비 2억 4000만 원을 들여 42만 7000정보를 개량하고 연간 약 900만 석을 증수하여 그 중 460만 석을 일본으로 가져가려 하였다. 그러나 1925년까지 공사착수 예정면적의 59%인 9만 8000 정보 가량이 착수되고, 준공 예정면적의 62 %인 7만 6000 정보가 준공되었으며, 농사개량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계획이 부진한 이유는 불황으로 사업자금 조달이 어려웠던 점, 특수회사가 설치되지 않은 점, 토지개량에 의한 수익보다 토지 소유에 의한 수익이 높았던 점 및 농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이었다.이에 일제는 정부 알선자금의 비중을 대폭 높이고, 사업 대행기관과 추진기관을 정비하여, 1926년부터 12년 동안 총공사비 3억 3000만 원을 들여 35만 정보를 개량하여 820만 석을 증수하려는 제2기 계획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 예정면적의 47%인 16만 5000정보를 개량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제2기 계획은 1930년대에 들어 실적이 극히 저조하였는데, 이는 공황기의 미가 하락으로 인한 수리조합의 경영 악화, 정부 알선자금의 급격한 감소 때문이었다. 농업공황으로 쌀 가격이 폭락하여 조선 쌀의 수출이 일본의 농촌경제를 악화시키자 일본 내부의 반발에 부딪혀 1934년에 중단되었다.

산미증식계획은 조선 쌀의 일본 유출을 증가시켰으며 또한 식민지 지주제를 강화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산미증식계획으로 증산된 양보다도 더 많은 쌀이 일본으로 반출되었기 때문에 조선 농민은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허덕였다. 그리고 토지개량사업의 중심사업인 수리조합이 지주를 중심으로 운영되어 일본인 ·조선인 대지주들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반면 중소지주·자작농·소작농들은 농업금융에서 배제되어 수리조합비의 부담, 고율 소작료, 고리대 등에 의해 몰락하였다. 일제의 적극적인 지주육성정책에 힘입어 성장한 조선인 지주들은 식민지 지배체제의 담당자로 편입되어 식민지 지배를 위한 사회적 기반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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