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 宣宗 ]
고려의 제13대 왕(재위 1083∼1094). 군비를 강화하여 요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송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였다. 유학을 장려하였으나, 불교 또한 신봉하여 국청사를 짓는 등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였다.
자 계천(繼天). 시호 안성(安成)·사효(思孝). 이름 운(運). 초명 증(蒸)·기(祈). 문종과 인예태후 이씨(仁睿太后李氏)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총명하고 효성스러웠으며 도량이 넓었다. 경서와 사서를 두루 연구하였고 문장에 뛰어났다. 1056년(문종 10) 국원후(國原侯)에 봉해진 데 이어 상서령(尙書令)에 제수되었다. 1083년 친형인 순종이 즉위한 후 수태사 겸 중서령 국원공에 올랐으나, 순종이 2달 만에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1084년(선종 1) 승과를 설치하였으며, 1085년 이복남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1086년에는 요나라에서 압록강 부근에 각장(榷場:국가에서 관리하는 시장)을 설치하고 교역을 하려 하자, 고주사 한형(韓瑩)을 보내어 폐지하기를 청하였다. 1086년 송나라에서 불교전적 3,000여 권을 가지고 돌아온 둘째동생 의천(義天)을 태후와 함께 봉은사(奉恩寺)에서 맞이하였다.
1088년 2월 요나라에서 재차 각장을 설치하려 하므로 중추원부사 이안(李顔)을 귀주(龜州)에 보내어 비밀히 대비하게 하였고, 9월에는 태복소경 김선석(金先錫)을 요나라에 보내어 각장을 혁파해 줄 것을 청하였다. 1089년 회경전(會慶殿)에 13층 금탑(金塔)을 세웠으며, 의천이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위하여 추진한 천태종 본산 국청사(國淸寺)의 건설을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시켰다. 1091년 서북면병마사 겸 중군병마사 유홍(柳洪)이 제작한 병거(兵車)를 귀주에 배치하였고, 국자감의 벽에 유교 72현의 초상을 그려 붙였다.
1093년 소감 박원작(朴元綽)이 제작한 천균노(千鈞弩)를 시험하였고, 병부상서 황종각(黃宗慤)과 공부시랑 유신(柳伸)을 송나라에 사은사로 보냈다. 이어 백관의 하례의식을 송나라의 조하식(朝賀式)에 맞추어 고쳤으며, 정포도감(征袍都監)에서 군복 3천벌~4천벌을 지어 동북(東北) 양계(兩界)에 나눠 보내어 병영창고에 보관해 두도록 하였다. 1094년 2월 어사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열병(閱兵)을 하였고, 4월에 병이 들어 5월 연영전(延英殿)에서 죽었다. 재위기간 중 특별한 사건이 없어 평온하였으나, 사탑(寺塔)을 짓는 토목공사를 일으켰으므로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였다. 능은 개성에 있는 인릉(仁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