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왕[ 聖德王 ]
신라의 제33대 왕(재위 702∼737).
성은 김(金), 이름은 흥광(興光), 시호는 성덕(聖德)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본명은 융기(隆基)였으나, 이름이 같은 당나라 현종(玄宗, 재위 712∼756)이 712년(성덕왕 11)에 사신을 보내 이름을 바꿀 것을 요구해오자 개명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일길찬(一吉湌) 김흠운(金欽運)의 딸인 신목왕후(神穆王后) 김씨(金氏)이다. 704년(성덕왕 3) 소판(蘇判) 김원태(金元泰)의 딸인 성정왕후(成貞王后) 김씨를 비로 맞이했으나 716년(성덕왕 15) 궁에서 내보냈고, 720년(성덕왕 19)에 이찬(伊湌) 순원(順元)의 딸인 소덕왕후(炤德王后)를 다시 비로 맞이했다. 성정왕후와의 사이에 김중경(金重慶)을 낳아 715년(성덕왕 14)에 태자로 봉했으나, 그는 717년(성덕왕 16)에 일찍 죽었다. 소덕왕후와의 사이에서는 김승경(金承慶, 제34대 효성왕)과 김헌영(金憲英, 제35대 경덕왕) 형제를 낳았다. 이 밖에 제37대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의 생모인 사소부인(四炤夫人) 김씨와 714년(성덕왕 13)에 당나라로 숙위로 보내진 김수충(金守忠) 등의 자녀가 있었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처음 왕비는 배소왕후(陪炤王后)로 시호가 엄진(嚴眞)이며, 후비는 점물왕후(占勿王后)로 시호가 소덕(炤德)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덕왕(聖德王)은 702년(효소왕 11) 친형인 효소왕(孝昭王, 692~702)이 아들이 없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효소왕이 6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16세의 나이로 죽었으므로, 성덕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의 나이도 15세가 넘지 않았다. 왕위에 오른 성덕왕은 아찬(阿湌) 원훈(元訓)을 중시(中侍)로 삼아 국정을 맡겼으며, 이듬해 그가 사임하자 아찬 원문(元文)을 중시로 임명했다. 그리고 705년(성덕왕 4) 원문이 죽은 뒤에는 아찬 신정(信貞)을 중시로 삼았다. 706년(성덕왕 5)에는 이찬 인품(仁品)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으며, 신정이 병으로 물러나자 대아찬(大阿湌) 문량(文良)을 중시로 임명했다. 712년(성덕왕 11)에는 문량이 죽자 이찬 위문(魏文)을 중시로 삼았다. 714년(성덕왕 13)에는 위문이 연로하여 사직하자 이찬 효정(孝貞)을 중시로 삼았으며, 718년(성덕왕 17)에는 파진찬(波珍湌) 사공(思恭)을 중시로 임명했다. 720년(성덕왕 19) 상대등 인품이 죽자 대아찬 배부(裴賦)를 상대등으로 삼았고, 사공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파진찬 문림(文林)을 중시로 삼았다. 722년(성덕왕 21)에는 이찬 선종(宣宗)을 중시로 삼았으며, 725년(성덕왕 24)에는 이찬 윤충(允忠)을 중시로 삼았다. 728년(성덕왕 27)에는 상대등 배부가 늙어 자리에서 물러나자 이찬 사공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36년에 이른 재위 기간에 신라는 정치적 안정을 누리며 제도의 정비와 문물의 발달을 이루었다. 711년(성덕왕 10) 남쪽지방의 주와 군을 직접 돌아보고 돌아온 성덕왕은 신하들이 경계해야 할 것을 밝힌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신하들에게 보였으며, 713년(성덕왕 12)에는 국가의 제사를 담당하는 전사서(典祀署)를 설치했다. 714년(성덕왕 13)에는 상문사(詳文師)를 통문박사(通文博士)로 명칭을 바꾸고 외교문서를 작성케 했으며, 717년(성덕왕 16)과 718년(성덕왕 17)에는 내궁의 관리와 호구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신궁(新宮)과 연사전(煙舍典)을 설치했다. 717년 의학박사(醫學博士)와 산박사(算博士)를 1명씩 두었고, 왕자 김수충이 당나라에서 공자와 제자들의 화상을 가져오자 이를 국학에 두었다. 718년에는 물시계인 누각(漏刻)을 처음으로 만들었고, 이를 담당하는 누각전(漏刻典)을 설치해 6명의 박사(博士)와 1명의 사(史)를 두었다. 721년(성덕왕 20)에는 소내학생(所內學生)의 직위를 만들었고, 732년(성덕왕 31)에는 금성 주위의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는 일을 담당하는 경성주작전(京城周作典)에 5명의 영(令)을 두었다.
한편, 성덕왕은 722년(성덕왕 21)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했다. 정전의 자세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으나 국가의 토지 지배력을 강화하고 수취체제를 정비하려는 목적에서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707년(성덕왕 6)에는 흉년으로 춘궁기에 굶어죽는 사람이 많아지자 7월까지 사람마다 하루에 조 3되를 지급하고 오곡(五穀)의 종자도 나누어 주는 등 백성의 구휼에도 힘을 기울였다.
성덕왕 때에 신라는 당나라와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거의 해마다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고, 왕자인 김수창·동생인 김사종(金嗣宗)·사촌인 김충신(金忠信) 등을 보내 숙위(宿衛)로 머무르게 했다. 723년(성덕왕 22)에는 나마(奈麻) 천승(天承)의 딸인 포정(抱貞)과 대사(大舍) 충훈(忠訓)의 딸인 정완(貞菀)이라는 2명의 미녀를 당나라 현종에게 보내고, 728년(성덕왕 27)에는 자제들의 당나라 국학(國學) 입학을 요청하기도 했다. 732년(성덕왕 31) 발해가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했을 때에는 당나라의 요청을 받아 김사란(金思蘭)으로 하여금 발해의 남부를 공격케 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외교정책으로 신라는 735년(성덕왕 34) 당나라로부터 패강(浿江, 지금의 대동강) 이남의 땅을 영토로 인정받았다.
'교육정보 > 신라 왕조 계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덕왕[ 景德王 ] (0) | 2022.06.09 |
---|---|
효성왕[ 孝成王 ] (0) | 2022.06.09 |
효소왕[ 孝昭王 ] (0) | 2022.06.08 |
신문왕[ 神文王 ] (0) | 2022.06.08 |
문무왕[ 文武王 ] (0) | 2022.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