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림왕[ 小獸林王 ]
고구려 제17대 왕.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도입하고, 태학을 설립하였으며 율령을 반포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하여 5세기 고구려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구부(丘夫)이다.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아들로 355년(고국원왕 25) 태자로 책봉되었다. 371년 고국원왕이 백제 군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소수림왕이 즉위한 당시는 국왕이 전사한 상황에서 국가의 체제 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넓은 영토와 주민들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제도의 정비가 요구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소수림왕은 즉위 후, 국가를 새로운 체제로 정비해 나갔다. 먼저, 372년 전진 왕 부견(符堅)이 보낸 승려 순도(順道)가 가져온 불상과 경문을 받아들여 최초로 불교를 수입하였다. 불교를 도입한 이유로는 전진(前秦)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고자 한 것과 호국사상의 필요성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같은 해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하였다. 태학은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한 인재를 양성하여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 적합한 관리를 양성하였다.
373년에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국가통치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규범들을 갖추었다. 율(律)은 형법법전, 령(令)은 비형벌적 민정법전으로 중국에서 성립된 성문법이다. 이러한 소수림왕의 체제정비 시책들을 기반으로 고구려는 5세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대외 관계에 있어서는 백제와 충돌이 계속되었는데, 375년에는 백제의 수곡성(水谷城)을 빼앗았으며 377년에는 3만 대군의 백제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의 북변(北邊)을 역습하였다. 그러나 378년에 거란(契丹)에게 북변을 빼앗겼다. 죽은 뒤, 소수림(小獸林)에 묻혔으며 동생 이련(고국양왕)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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