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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신라 왕조 계보

신문왕[ 神文王 ]

by 1티어 율쌤 2022.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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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 神文王 ]

 

신라의 제31대 왕 (재위 681∼692).

성은 김(金), 이름[諱]은 정명(政明), 자(字)는 일초(日怊)이다. 시호는 신문(神文)이며, 이름을 따서 정명왕(政明王)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이다. 태자로 있을 때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의 딸과 결혼했으나 장인인 김흠돌이 모반의 혐의로 처형된 뒤에 폐출하였고, 683년(신문왕 3) 일길찬(一吉湌) 김흠운(金欽運)의 딸인 신목왕후(神穆王后) 김씨(金氏)를 새로 왕비로 맞이했다. 폐비 김씨와의 사이에는 오래토록 아들이 없었고, 신목왕후와의 사이에서 김리홍(金理洪, 제32대 효소왕), 김흥광(金興光, 제33대 성덕왕), 김근질(金釿質), 김사종(金嗣宗) 등을 낳았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에는 신문왕의 자(字)가 일소(日炤)이고 어머니는 자눌왕후(慈訥王后)라고 기록되어 있다.

665년(문무왕 5) 태자로 봉해졌으며, 681년(문무왕 21) 가을 아버지 문무왕이 죽은 뒤에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뒤에 서불한(舒弗邯) 진복(眞福)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했으며, 왕비의 아버지인 소판 김흠돌과 파진찬(波珍湌) 흥원(興元), 대아찬(大阿湌) 진공(眞功) 등을 모반의 혐의로 처형했다. 그리고 병부령(兵部令)이던 이찬(伊湌) 군관(軍官)도 이들에게 동조했다는 혐의로 처형했고, 왕실 호위를 담당하는 시위부(侍衛府)에 감(監) 직위를 없애고 장군(將軍) 6인을 두었다.

신문왕은 삼국통일로 넓어진 영토를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지방행정체제를 정비하고, 고구려·백제의 유민들을 각지로 이주시켰다. 683년(신문왕 3)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익산)에서 고구려왕으로 봉해졌던 보덕왕(報德王) 안승(安勝)에게 소판(蘇判)의 직위와 김씨 성을 주어 금성(金城)에 머무르게 했다. 그리고 안승의 족자(族子)인 대문[大文, 실복(悉伏)이라고도 한다]이 금마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였다. 보덕성(報德城)에서 웅거하던 나머지 세력도 평정한 뒤에는 금마저를 금마군(金馬郡)으로 삼고, 그곳의 고구려 유민들을 남쪽의 주와 군으로 이주시켰다. 685년(신문왕 5)에는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를 다시 설치해 용원(龍元)을 총관(摠管)으로 삼았으며, 거열주(居列州)를 분할해 청주(菁州, 지금의 진주)를 설치하고 대아찬(大阿湌) 복세(福世)를 총관으로 삼아 전국을 9주(九州)로 구분하였다. 그 해에 서원소경(西原小京, 지금의 청주)과 남원소경(西原小京, 지금의 남원)을 설치해 여러 주와 군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북원소경(北原小京, 지금의 원주)에 둘레가 1,031보가 되는 성을 쌓았다. 이로써 기존의 금관소경(金官小京, 지금의 김해), 국원소경(國原小京, 지금의 충주)과 더불어 5소경 체제의 기틀도 마련되었다. 686년(신문왕 6)에는 옛 백제의 땅에 석산(石山)·마산(馬山)·고산(孤山)·사평(沙平)의 4개 현(縣)을 설치했고, 사비주(泗沘州, 지금의 부여)와 발라주(發羅州, 지금의 나주)를 군(郡)으로 내리고 그 대신 웅천군(熊川郡, 지금의 공주)과 무진군(武珍郡, 지금의 광주)을 주(州)로 승격시키고 도독(都督)을 두었다. 또한 항복해온 고구려인들에게 차등을 두어 관작(官爵)을 제수했다. 687년(신문왕 7)에는 일선주(一善州, 지금의 구미)를 폐지하고 사벌주(沙伐州, 지금의 상주)를 다시 두었으며, 파진찬 관장(官長)을 총관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벌주와 삽량주(歃良州, 지금의 양산)에 각각 둘레가 1,109보와 1,260보인 성을 쌓았다. 689년(신문왕 9) 서원소경에 성을 쌓았고, 690년(신문왕 10)에는 전야산군(轉也山郡, 지금의 경남 남해군)을 설치했다. 691년(신문왕 11)에는 남원소경에 성을 쌓았다.

그리고 고구려와 말갈의 유민을 흡수하여 9서당(九誓幢) 체제를 갖추는 등 군사조직도 정비하였다. 683년(신문왕 3)에 고구려인으로 황금서당(黃衿誓幢)을, 말갈인으로 흑금서당(黑衿誓幢)을 만들었다. 686년(신문왕 6)에는 고구려 유민인 보덕성 사람들로 벽금서당(碧衿誓幢)과 적금서당(赤衿誓幢)을 만들었고, 687년(신문왕 7)에는 백제의 남은 인원으로 청금서당(靑衿誓幢)을 만들었다. 이로써 진평왕과 문무왕 때에 만들어졌던 녹금서당(綠衿誓幢)과 자금서당(紫衿誓幢), 백금서당(白衿誓幢), 비금서당(緋衿誓幢)과 더불어 9서당 체제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적금무당(赤衿武幢, 687년)과 황금무당(黃衿武幢, 689년)도 만들어 문무왕 때의 백금무당(白衿武幢)과 더불어 3무당(三武幢)이라 하였다. 이 밖에 690년(신문왕 10)에는 한산변(漢山邊, 경기도 광주), 우수변(牛首邊, 강원도 춘천), 하서변(河西邊, 강원도 강릉)에 주둔하며 변경을 지키는 3변수당(三邊守幢)을 구성했고, 창병(槍兵)들로 이루어진 개지극당(皆知戟幢)도 설치했다. 685년(신문왕 5)에는 6정(六停) 가운데 하주정(下州停)을 폐지하고 완산정(完山停)을 설치하기도 했다.

신문왕의 아버지인 문무왕은 변경의 성과 요새, 주와 군의 조세 가운데 불필요한 것을 폐지하고, 불편한 법령과 격식을 개혁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신문왕은 이러한 유언에 따라 행정체제와 수취체제를 개편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 했다. 682년(신문왕 2) 위화부(位和府)에 영(令) 2인을 두어 관리의 선발과 추천을 담당케 했고, 관리 양성을 위해 국학(國學)을 세웠으며, 산업을 장려하기 위해 공장부(工匠府)와 채전(彩典)에 감(監) 1인씩을 두었다. 683년(신문왕 3)에는 순지(順知)를 중시(中侍)로 임명했고, 685년(신문왕 5)에는 집사부(執事部)에 사지(舍知) 2인, 조부(調府)에 사지 1인을 두었다. 686년(신문왕 6)에는 이찬 대장(大莊)을 중시로 삼았으며, 예작부(例作府)에 경(卿) 2인을 두었다. 687년(신문왕 7) 음성서(音聲署)의 수장을 경(卿)으로 하였고, 688년(신문왕 8) 대장이 죽자 이찬 원사(元師)를 중시로 삼았다. 690년(신문왕 10)에는 원사가 병으로 물러나자 아찬 선원(仙元)을 중시로 삼았다. 특히 신문왕은 귀족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인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그것을 관료전(官僚田)이나 세조(歲租)로 대체해 전제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687년(신문왕 7) 문무 관료들에게 직급에 따라 관료전을 지급했으며, 689년(신문왕 9)에는 중앙과 지방 관리들의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직급에 따라 세조를 지급하는 것을 상규(常規)로 삼게 했다. 이 해에는 달구벌(達句伐, 지금의 대구)로 도읍을 옮기려고도 했으나 실행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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