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 李完用 ]
을사오적의 한 사람이며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로 불린다.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늑약 체결과 서명을 주도했고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후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헤이그특사사건 후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물러날 것을 강요했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총리대신으로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친일파 전향과 을사늑약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황제의 명으로 궁내부 특진관(宮內部特進官)으로 임명되었다. 고종황제는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려했지만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데프트밀약으로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각각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이완용은 이때부터 변절하여 친일파로 바뀌었으며 1905년 학부대신이 되고, 같은 해 11월 18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의 한 사람으로 최악의 매국노가 되었다. 이때 그의 적극성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관심을 받게되었으며 그해 12월에 의정대신서리·외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조선 민중의 분노와 을사오적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의 지시대로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양위(讓位)할 것을 강요, 순종을 즉위시켰다. 당시 수만명의 군중들이 덕수궁으로 몰려가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규탄하였고 그의 집은 군중들에 의해 불탔다. 그해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대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서명하고 순종의 재가를 받았으며 이로써 인사, 입법, 행정 등 주요 권한을 일본에 이양하였다. 1909년 7월에는 이완용 단독으로 기유각서(己酉覺書)를 맺어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었다.
암살 위협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피살되고 그해 12월 이완용은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李在明)의 칼을 맞고 오른쪽 폐를 관통당했지만 목숨을 건졌다. 1910년 8월 29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全權委員)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선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명칭이 변경되고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이 되었다.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일본 정부에 의해 백작(伯爵)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고 1911년 조선귀족원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20년 매일신보에 경고문을 발표하여 3.1운동을 비판한 공로로 1920년 후작(侯爵)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도 일본으로 부터 남작의 지위를 받았다. 1926년 6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글씨에 뛰어났다고 전해지며 편저에 《황후폐하 치사문(皇后陛下致詞文)》이 있다.
'교육정보 > 역사와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창호[ 安昌浩 ] 한말의 독립운동가 (0) | 2022.09.28 |
---|---|
젊은 시인 윤동주[ 尹東柱 ] (0) | 2022.09.28 |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 Oscar-Claude Monet ] (0) | 2022.09.28 |
안중근[ 安重根 ]의사 업적과 순국 (0) | 2022.09.28 |
전라도 수군절도사 이순신[ 李舜臣 ] (0) | 2022.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