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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

조사 시찰단[ 朝士視察團 ]

by 1티어 율쌤 2022. 1. 27.

조사 시찰단[ 朝士視察團 ]

 

조선 후기 1881년(고종 18) 일본에 파견한 시찰단.

 

조선 말기 강화도조약(1876)이 체결됨으로써, 그 동안 외국 정세에 어둡던 조선은 해외에 문호를 처음 개방하고 동시에 해외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 첫 과업으로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하여 우선 일본의 문물을 보고 오는 일이었다. 1876년에 제1차 수신사로 김기수(金綺秀)가 파견되었고, 제2차 수신사로 김홍집(金弘集)이 파견되었다(1880). 김홍집은 일본에서 오면서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이 저술한 《조선책략》이란 책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책은 조선의 존립을 위해 중국, 일본, 미국과 같은 주변 강대국과 외교적으로 교섭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이론은 조선 조야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우선 중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의 문물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개화론이 제기되었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정부 조직도 근대화를 위해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였다. 
 
그 첫 번째로 지금까지 중국에 가까이 했던 것과는 달리 우선 일본을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 따라 일본에 시찰단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국내에는 그 반대 이념인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이 거세어 대립상태에 있었다. 정부는 이러한 이념적 대립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시찰단으로 파견할 사람들을 암행어사 형식으로 임명하여 비밀리에 부산에 집결토록 한 다음에, 김홍집과 하나부사(花房義質) 사이에 협의가 이루어져 파견이 추진되었다. 모든 경비도 한국 측에서 부담하여 일본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핵심인물로는 박정양(朴定陽), 어윤중(魚允中), 조준영(趙準永), 엄세영(嚴世永), 강문형(姜文馨), 조병직(趙秉稷), 민종묵(閔種黙), 이헌영, 심상학(沈相學), 홍영식(洪英植), 이원회(李元會), 김용원(金鏞元)으로 30 ~ 40대의 젊은 지도자들이었다. 시찰단은 이들을 중심으로(조사 朝士 - 전문위원) 하여, 수원(隨員 수행원) 2인, 통사(通士 통역사) 1인, 하인 1인 총 5인으로 1반(班)을 구성하여, 각 반별로 조사 대상을 정하여 최종 조사보고서를 작성하도록 계획을 세웠다. 이 조직에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이 참여하여 개화에 적극적 활동을 하였다. 

조사 시찰단은 1881년 4월 10일 부산을 출발하였다(서울에서 부산까지는 암행어사 신분으로 내려감). 도쿄에 도착한(4월 28일) 시찰단은 공무(公務)가 아닌 사행(私行)으로 자처하고 공공기관에 체재하지 않고 각 반별로 민박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책임자를 임명하여 이들을 크게 환대하였다. 시찰단은 왕족과 고급 대신들도 면담하였다. 약 2개월 반에 걸친 조사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하고, 일본측의 성대한 환송연을 받고, 7월 24일 일본을 출발하여, 다음 달인 윤 7월 3일 동래에 도착하였다. 약 4개월간의 여행이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는 다시 암행어사의 신분으로 민정을 살피면서 2개월여가 지나 귀경하였다. 

각 반은 시찰기류(視察記類)와 문견사건류(聞見事件類)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이들이 조사한 대상은 일본의 정부 각 부처와 육군, 세관, 포병공창, 산업시설, 도서관, 박물관 등이었다. 정부(고종)의 강한 의지로 조사 시찰단을 파견한 결과 선진 일본의 문물을 자세히 알게 되었고, 국내에 개화 여론을 확대하는 데 크게 역할을 하였다. 

과거에는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라고 하였으나 '한국사 용어 수정안'에 따라 조사 시찰단으로 변경되었다.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신사’는 선비지식층을 의미하며, ‘유람단’은 돌아다닌다는 뜻으로, 국가차원의 공식적인 출장 의미를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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