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덕여왕[ 眞德女王 ]
신라의 제28대 왕(재위 647∼654).
성은 김(金), 이름[諱]은 승만(勝曼)이다. 시호는 진덕(眞德)이며, 태화(太和, 647〜650)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성골(聖骨) 출신의 마지막 왕으로 아버지는 제26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의 동생인 진안 갈문왕(眞安葛文王) 국반[國飯, 국분(國芬)]이며, 어머니는 월명부인(月明夫人) 박씨(朴氏)이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에는 아버지가 국기안(國其安) 갈문왕(葛文王)이고 어머니는 아니부인(阿尼夫人) 박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키가 7척이나 되었고, 늘어뜨리면 무릎 아래에 닿을 정도로 팔이 길었다고 한다. 진덕여왕은 647년(선덕여왕 16) 사촌인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해 정월에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이 염종(廉宗)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이 진압되면서 선덕여왕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는 진덕여왕 원년(元年)의 기록을 비담 등을 처형한 정월 17일에서 시작하고, 선덕여왕은 그해 8월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위에 오른 진덕여왕은 이찬(伊湌) 알천(閼川)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그리고 651년(진덕여왕 5)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로 고치고, 파진찬(波珍湌) 죽지(竹旨)를 중시(中侍)로 임명해 기밀 사무를 담당하게 하는 등 관제를 개혁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다. 조세와 부역을 관장하는 조부(調府)에 2인의 영(令)을 두었으며, 국가 재정을 관리하는 창부(倉部)를 설치해 영(令)과 경(卿)을 2인씩 두었다. 국가의 의례와 교육을 관장하는 예부(禮部)에는 경(卿) 2인 등을 추가해 실무조직을 강화하였고, 외교 업무를 관장하는 영객전(領客典)에는 2인의 영(令)을 두었다. 형률(刑律)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좌리방부(左理方府)를 설치해 652년(진덕여왕 6) 파진찬 천효(天曉)를 좌리방부령으로 삼고, 경(卿) 2인을 두었다. 관리들의 포상을 관장하는 상사서(賞賜署), 음악과 그림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음성서(音聲署)와 채전(彩典), 공장의 일을 관장하는 공장부(工匠府), 국가의 제사를 관장하는 전사서(典祀署) 등에는 대사(大舍)나 주서(主書) 2인씩을 두었다. 이처럼 진덕여왕은 진평왕 때 이루어진 행정체제의 정비를 더욱 체계화하였다.
군사조직도 정비했는데 651년 왕궁 호위를 담당하는 시위부(侍衛府)를 설치했고, 652년에는 궁사들로 구성된 부대인 2궁(二弓) 가운데 하나인 한산주(漢山州) 궁척(弓尺)을 만들었다. 이 밖에 650년(진덕여왕 4)에는 진골(眞骨)로서 관직에 있는 자는 아홀(牙笏)을 들게 했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초하루에는 조원전(朝元殿)에서 백관들의 신년 하례를 받았는데, 새해를 축하하는 예식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진덕여왕의 재위기간에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을 동시에 받아야 했다. 647년(진덕여왕 원년) 백제가 무산성茂山城), 감물성(甘勿城), 동잠성(桐岑城) 등 3개의 성을 둘러싸고 공격해왔으나 진덕여왕은 김유신(金庾信)에게 1만의 병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게 하여 이를 물리쳤다. 648년(진덕여왕 2)에도 의직(義直)이 이끄는 백제군이 서쪽 변경을 침공하여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개의 성을 점령했으나 압량주(押梁州) 도독(都督)으로 있던 김유신이 이를 물리쳤다. 649년(진덕여왕 3)에는 은상(殷相)이 이끄는 백제군이 석토(石吐) 등 7개의 성을 점령했으나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도살성(道薩城) 아래에서 백제군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고립을 피하기 위해 신라는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더욱 강화하였다. 진덕여왕은 647년, 648년, 650년, 651년, 652년, 653년 등 해마다 사신을 보내 당나라의 지원을 받으려 했다. 당나라 태종(太宗, 재위 626~649)은 647년 사신을 보내 진덕여왕을 주국(柱國)으로 삼고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봉했다. 이듬해에는 신라의 사신 감질허(邯帙許)에게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추궁하며 김춘추(金春秋, 무열왕)와 그의 아들 김문왕(金文王)을 당나라로 보내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648년 김춘추가 당나라로 가서 군대를 보내 백제를 공격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진덕여왕은 김춘추의 아들인 김문왕을 숙위(宿衛)로 당나라에 머무르게 했고, 650년에는 비단에 《태평송(太平頌)》을 수놓아 김춘추의 아들인 김법민(金法敏, 문무왕)을 통해 당나라 고종(高宗, 재위 649~683)에게 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651년에는 김춘추의 아들인 파진찬 김인문(金仁問)을 당나라로 보내 숙위로 머무르게 했다.
진덕여왕은 648년(진덕여왕 2) 김춘추가 당나라에 다녀온 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649년(진덕여왕 3) 정월에 관리들의 의관(衣冠)을 중국식으로 바꾸었고, 650년에는 즉위 이후에 사용하던 ‘태화’라는 연호를 당나라의 연호인 영휘(永徽, 650〜655)로 바꾸어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진덕여왕은 654년(진덕여왕 8) 봄에 사망했으며, 사량부(沙梁部)에 매장되었다. 오늘날 경주시 현곡면에 위치한 진덕여왕릉은 사적 2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둘레돌에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는 선덕여왕의 언니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의 아들이자 제26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의 손자인 김춘추가 제29대 무열왕(武烈王, 재위 654~661)으로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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