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혜왕[ 忠惠王 ]
고려의 제28대 왕(재위 1330∼1332, 복위 1339∼1344).
성은 왕(王), 이름[諱]은 정(禎)이며, 몽골 이름은 부다시리[寶塔實里, Buddhašri]이다. 충혜(忠惠)는 중국의 원(元)나라에서 부여한 시호(諡號)이며, 고려 왕실에서 올린 시호는 헌효(獻孝)이다.
1315년(충숙왕 2) 고려의 제27대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30, 복위 1332~39)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홍규(洪奎)의 딸 명덕태후[明德太后, 사후에 공원왕후(恭元王后)의 시호를 받음] 홍씨이다. 제31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과는 동복형제의 관계이다. 1328년(충숙왕 15) 고려의 세자로 원나라로 가서 숙위(宿衛)하다가, 1330년(충숙왕 17) 2월에 아버지인 충숙왕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해 4월 원나라의 왕족(王族)인 관서왕(關西王) 초팔(焦八)의 장녀 덕녕공주[德寧公主, 뒤에 원나라에서 정순숙의공주(貞順淑儀公主)의 존호를 받음]와 결혼했고, 9월에 귀국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충혜왕(忠惠王)은 승려 내원(乃圓)을 왕사(王師)로 삼았으며, 노비 출신인 박연(朴連)을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중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원나라 조정에서 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려는 논의가 이루어지자 자신과 가깝게 지내던 원나라의 우승상 엘 테무르(燕帖木兒)에게 글을 보내 이를 중지시켰다. 1331년(충혜왕 1)에는 화폐를 개혁해 이전에 사용하던 은병(銀甁)을 대신해 소은병(小銀甁)을 발행했다. 소은병은 오종포(五綜布) 15필의 가치를 두었다. 이 밖에 염장별감(塩場別監)을 설치하고, 경기도의 사급전(賜給田)을 없애고 녹과전(祿科田)을 지급하는 등 국가 재정 체제를 정비하기 위한 정책들을 실시했다.
하지만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종속되어 있었고, 고려의 왕족인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는 엘 테무르와 대립하던 원나라의 태보(太保) 바얀(伯顏, Bayan, ?~1340)과 손을 잡고 고려의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 결국 충혜왕은 1332년(충혜왕 2) 원나라 조정에서 탄핵을 받아 왕위에서 쫓겨나 원나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인 충숙왕이 다시 고려의 왕위에 올랐다.
1339년(충숙왕 복위 7) 5월 충숙왕이 죽자 충혜왕은 다시 고려의 왕으로 복위하였다. 당시에도 심양왕 왕고를 지지하던 조적(曺頔) 등이 충숙왕의 왕비인 경화공주(慶華公主)와 손을 잡고 충혜왕의 궁을 습격하기도 했으나, 충혜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반격해 이를 물리쳤으며 그해 11월 원나라에게서 국인(國印)을 받아 왕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경화공주가 원나라 조정에 충혜왕의 음란함을 발고하면서 왕은 그해 12월 홍빈(洪彬) 등의 측근들과 함께 원나라로 압송되었다. 그 뒤 충혜왕은 원나라 형부에 수감되었으며, 경화공주는 김지겸(金之謙)과 김자(金資)를 권정동성사와 도첨의사사 제조로 임명하는 등 고려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원나라로 압송되었던 충혜왕은 1340년 4월 원나라의 승상이던 토크토[脱脱, 1314~1355]의 건의로 석방되어 다시 왕으로 복위했으며, 윤석(尹碩)과 한악(韓渥)을 좌우 정승으로 임명하고 고려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인 충숙왕과 마찬가지로 원나라에 압송되었다가 돌아온 뒤에는 사냥 등에만 탐닉하며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특히 《고려사(高麗史)》 등에는 충혜왕이 여색(女色)을 매우 탐하여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저질러 백성의 원성을 샀다고 기록되어 있다. 1343년(충혜왕 복위 4)에는 삼현(三峴)에 궁궐을 새로 짓기 시작했는데, 민가에는 왕이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에 어린아이들을 잡아다 묻는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그리고 기철(奇轍)과 이운(李芸), 조익청(曹益淸) 등은 원나라 조정에 충혜왕의 음란함을 알리며 행성의 설치를 요구했다. 결국 충혜왕은 그해 12월 다시 원나라로 압송되었으며, 게양현(揭陽縣, 지금의 광둥성 지에양)으로 유배되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재상들이 백관(百官)과 원로들의 서명을 받아 왕의 석방을 요구하려 했으나, 충혜왕은 이듬해 1월 유배지로 가던 중에 악양현(岳陽縣, 지금의 후난성 웨양)에서 3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충혜왕이 죽은 뒤에 원나라에 머무르던 그의 아들 충목왕(忠穆王, 재위 1344~1348)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고, 충혜왕의 왕비인 덕녕공주가 섭정을 하였다. 충혜왕에게는 덕녕공주 이외에 희비(禧妃) 윤씨와 화비(和妃) 홍씨, 은천옹주(銀川翁主) 임씨 등의 비빈(妃嬪)이 있었다. 왕의 유해는 고려로 돌아와 개성의 영릉(永陵)에 매장되었으며, 공민왕 때에 헌효대왕(獻孝大王)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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