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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

한일합병[ 韓日合倂 ]

by 1티어 율쌤 2022. 1. 28.

한일합병[ 韓日合倂 ]

 

1910년(대한제국 융희 4)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병조약에 따라 국권을 상실한 일.

1904년 8월 일제는 제1차 한일협약(한일협정서)을 강제로 체결,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와 외무에 두도록 하여 재정권과 외교권을 침탈하였다. 나아가 한국 식민지화를 앞두고 열강의 외교적 승인을 얻는 공작에 전력을 기울여, 미국과는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밀약(桂太郎-Taft密約)’을 맺고, 영국과는 8월에 제2차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양국으로부터 한국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승인받기에 이른다. 

또한, 러일전쟁의 우세한 전황 속에서 9월에 체결된 포츠머스(Portsmouth)강화조약 결과 한국 안에서의 러시아 세력도 완전히 배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 식민지화’의 국제적 승인까지 받아 놓은 상황에서 1905년 11월, 일제는 고종을 협박하고 매국노들을 매수해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국권을 강탈당해 형식적인 국명만을 가진 나라로 전락하였다.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은 완전히 박탈되어, 영국·청·미국·독일 등 주한 외국공관들도 철수하고 말았다. 

고종은 이와 같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한국의 주권 수호를 호소할 목적으로 1907년 6월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헤이그특사파견 사실을 안 일제는 7월 20일,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하여금 배일의식이 강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신 순종을 즉위하게 하였다. 이어 7월 24일에는 정미칠조약을 체결, 한국의 내정권마저 장악하였다. 

같은 달 27일에는 언론 탄압을 목적으로 한 광무보안법을 잇달아 공포하여 한국민의 항일 활동을 한층 탄압하였다. 이어서 한국 식민지화의 최대 장애였던 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을 8월 1일부터 약 한 달에 걸쳐 단행하였다. 

이때 상당수의 한국 군인은 군대 해산에 반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뒤 의병에 합류하였고, 이로써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된 의병 항전은 대일 전면전의 성격으로 격화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치열하게 전개된 의병 항전은 1909년 9월,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에 밀려 그 기세가 누그러진다. 

일제의 국권 침탈이 가속화되어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이 어려워지자 상당수 항일민족운동자들은 항일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기 위해 만주나 시베리아 등지로 이주, 망명하게 되었다. 한편, 안중근(安重根)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대한 침략의 원흉 이토를 총살, 한민족의 울분을 대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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