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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

헤이그특사사건[ ─特使事件 ]

by 1티어 율쌤 2022. 1. 28.

헤이그특사사건[ ─特使事件 ]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 활동.

1906년 6월 평화회의의 주창자인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Nicholas Ⅱ)가 극비리에 고종에게 제2회 만국평화회의의 초청장을 보내왔다. 고종은 일제의 폭력적 침략을 호소하고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이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헤이그에 밀파된 특사는 정사(正使)에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李相卨), 부사(副使)에 전 평리원검사 이준(李儁)과 주로한국공사관(駐露韓國公使館) 참서관(參書官) 이위종(李瑋鍾) 등 모두 3인이다. 세 특사 외에도 헐버트가 처음부터 사절단을 도왔고 박용만(朴容萬)이 미국에서 1907년 7월 초순 헤이그에 파견한 윤병구(尹炳球)·송헌주(宋憲澍)도 특사 일행을 도왔다. 

세 특사의 한국 출발 시기는 각각 달랐다. 이상설은 평화회의가 개최되기 1년 전인 1906년 4월에 한국을 떠나 북간도 용정촌(龍井村)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준은 1907년 4월서울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만났다. 두 특사는 6월 중순경 시베리아철도 편으로 당시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Petersburg: 지금의 상 페테르부르크)에 도착, 주로공사(駐露公使) 이범진(李範晉)의 아들 이위종과 합류하였다. 

여기서 세 특사는 전 주한러시아공사 베베르(Veber, K. I.)와 바파로프 등을 통해 도움을 받고자 활동했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세 특사는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도착 즉시 시내의 융(Jong) 호텔에 숙소를 정해 태극기를 게양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제의 한국침략상을 폭로함으로써 국권회복에 열강의 후원을 얻는 것이었다. 

특사 일행은 먼저 평화회의에 공식적으로 한국 대표의 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의장인 러시아대표 넬리도프(Nelidof) 백작과 네덜란드 외무대신 후온데스를 연달아 방문해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넬리도프는 형식상의 초청국인 네덜란드에 그 책임을 미루었다. 또 후온데스는 각국 정부가 이미 을사조약을 승인한 이상 한국정부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회의 참석과 발언권을 거부하였다. 

이 특사 일행은 미국·프랑스·중국·독일 등 각국 대표들에게도 협조를 구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하는 수없이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의 입장을 담은 공고사(控告詞)를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고, 그 전문을 『평화회의보』에 발표하였다. 특사들은 또 7월 9일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인 스테드(Stead, W. T.)가 주관한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참석, 발언할 기회를 얻었다. 

여기서 외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이 세계의 언론인들에게 한국의 비참한 실정을 알리고 주권 회복에 원조를 청하는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를 절규, 청중의 공감을 샀다. 즉석에서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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