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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신라 왕조 계보

희강왕[ 僖康王 ]

by 1티어 율쌤 2022.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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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강왕[ 僖康王 ]

 

신라의 제43대 왕(재위 836∼838).

성은 김(金), 이름은 제륭(悌隆)으로 제옹(悌顒)이라고도 한다. 시호는 희강(僖康)이다. 신라의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의 증손자로, 조부는 원성왕의 셋째아들인 김예영(金禮英)이고 부친은 이찬(伊湌) 김헌정(金憲貞)이다. 모친은 포도부인(包道夫人) 박씨이며, 비는 갈문왕(葛文王) 김충공(金忠恭)의 딸인 문목부인(文穆夫人) 김씨이다. 김충공은 원성왕의 맏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 김인겸(金仁謙)의 아들이므로 6촌 누이를 비로 맞이한 셈이다. 자식으로는 제48대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의 아버지인 아찬(阿湌) 김계명(金啓明)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당나라 문종(文宗, 재위 827〜840)이 837년(희강왕 2)에 숙위(宿衛)로 당나라에 머무르고 있던 왕자 김의종(金義琮)을 신라로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전해지지만, 신라에서는 당나라로 숙위나 사신으로 보내진 왕족들에 대해서도 왕자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가 희강왕의 왕자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희강왕의 이름이 개륭(愷隆)이며, 모친은 대아간(大阿干) 충연(忠衍)의 딸인 미도부인(美道夫人)으로 심내부인(深乃夫人)이나 파리부인(巴利夫人)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왕비 문목부인에 대해서도 각간(角干) 충효(忠孝)의 딸이며, 각간 중공(重恭)의 딸이라고도 한다고 적혀 있다.

희강왕은 836년(흥덕왕 11) 음력 12월에 당숙(堂叔)인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이 적장자가 없는 상태에서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희강왕은 숙부인 상대등(上大等) 김균정(金均貞)과 왕위 계승을 놓고 다투었는데, 시중(侍中)이던 김명(金明), 아찬(阿湌) 이홍(利弘)과 배훤백(裴萱伯) 등은 희강왕을 지지했고, 아찬 김우징(金祐徵, 제45대 신무왕)과 김예징(金禮徵)·김양(金陽) 등은 김균정을 지지했다. 김우징과 김양은 적판궁(積板宮)에서 김균정을 왕으로 세우고 사병으로 호위하였으나, 김명과 이강 등은 적판궁을 에워싸고 공격해 김균정을 죽이고 희강왕을 왕으로 세웠다.

왕위에 오른 희강왕은 837년(희강왕 2) 아버지인 김헌정을 익성대왕(翌成大王)으로, 어머니인 포도부인 박씨를 순성태후(順成太后)로 추봉했다. 그리고 자신을 왕위에 앉히는 데 공을 세운 시중 김명을 상대등으로, 아찬 이홍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아버지 김헌정의 시호가 흥성대왕(興聖大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희강왕의 재위 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실 내부의 갈등은 더욱 확대되었다. 김균정의 아들인 김우징은 가족들과 함께 황산진(黃山津)으로 도망쳐 배를 타고 청해진(淸海鎭, 지금의 완도)으로 건너가 장보고(張保皐)에게 보호를 청했다. 김균정의 매제인 아찬 김예징도 아찬 김양순(金良順)과 함께 김우징과 합류했다. 한기(韓岐)로 도망친 김양도 산속에 숨어 세력을 모으며 복수를 꾀했다.

왕실 내부의 갈등으로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는 가운데 838년(희강왕 3) 정월에 상대등 김명과 시중 이홍 등이 군사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의 측근들을 죽였다. (김명의 난) 희강왕은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을 알고 궁중에서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희강왕은 소산(蘇山)에 매장되었는데, 오늘날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에 있는 희강왕릉은 사적 제220호로 지정되어 있다. 희강왕이 죽은 뒤에는 상대등 김명이 왕위에 올라 제44대 민애왕(閔哀王, 재위 838~839)이 되었다. 그는 김충공의 아들로 희강왕의 왕비인 문목부인과는 남매 사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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