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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

광주학생항일운동[ 光州學生抗日運動 ]

by 1티어 율쌤 2022.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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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항일운동[ 光州學生抗日運動 ]

 

1929년 11월 광주에서 시작되어 이듬해 3월까지 전국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시위운동으로 3ㆍ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운동이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일어난 광주고등보통학교(光州高等普通學校, 지금의 광주제일고)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 학생들의 충돌이 계기가 되었다. 광주중학 3학년인 후쿠다 슈조[福田修三] 등의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고보 3학년인 박기옥(朴己玉) 등을 희롱하였고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朴準埰) 등과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광주고보와 광주중학 학생들의 패싸움으로 확산되었고, 일본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고 조선인 학생들을 구타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광주고보 학생들은 11월 3일 광주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11월 3일(음력 10월 3일)은 일왕 메이지[明治, 재위 1867~1912]의 생일인 명치절(明治節)이어서 학생들은 이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그리고 그 날 광주에서는 전남 누에고치 6백만 석 돌파 축하회가 열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명치절 행사를 마친 광주고보 학생들은 광주 시내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일부 학생은 나주 사건에 대해 편파 보도를 했던 광주일보사로 몰려가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기도 했다. 그리고 신사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던 광주중학의 일본인 학생들과 집단으로 충돌하여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날의 시위는 비교적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었으며, 여기에는 광주고보만이 아니라 광주여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도 일부 참여했다. 일제는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광주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시위에 참여한 조선인 학생 수십 명을 구금하였다. 

학생들의 시위 소식이 전해지자 신간회(新幹會)에서는 김병로(金炳魯)·허헌(許憲)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파견했고, 청년조직인 조선청년동맹과 학생전위동맹도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광주 지역의 학생비밀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모태로 하여 결성된 독서회 중앙본부의 장재성(張載性) 등은 광주의 사회단체들과 함께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하여 학생들의 시위를 전면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당시 장재성은 광주 지역 학생들의 행동지도를 맡았고, 장석천(張錫天)은 시위의 전국적 확산, 국채진(鞠埰鎭)은 전남 지역 학생의 지도, 박오봉(朴五鳳)은 노동자와 노동단체의 지도, 임종근(林鍾根)은 전남 지역의 공립보통학교 교사들과의 연락, 강석원(姜錫元)은 외부와의 연락, 나승규(羅承奎)는 운동자금 조달 등으로 역할을 나누었다. 그리고 11월 7일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권유근(權遺根)·박일(朴日), 조선청년동맹의 부건(夫健) 등과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문제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들은 11월 11일 저녁에 격문을 살포하여 11월 12일에 광주 시내에서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여고보, 광주사범학교 학생들도 참여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당시 학생들은 격문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의 자유 보장,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 민족 문화와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 보장 등 9개 항목을 내세웠다. 이 날의 시위로 수백 명의 학생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으며, 광주 지역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학생들의 시위운동은 목포와 나주 등 인접 지역으로 퍼져갔고, 12월과 이듬해 1월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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