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이사금[ 儒理尼師今 ]
성은 박(朴), 이름[諱]은 유리(儒理), 왕호(王號)는 이사금(尼師今)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름이 노례(弩禮)와 유례(儒禮)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제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재위 4∼24)의 아들로 어머니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다.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여 제7대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재위 134~154)과 제5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재위 80~112) 등을 낳았다. 《삼국사기》에는 왕비가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박씨(朴氏)였다는 설도 있다고 전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사요갈문왕(辭要葛文王)의 딸인 김씨(金氏)가 왕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24년(남해 21) 아버지인 남해차차웅이 죽은 뒤에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당시 유리이사금이 누이의 남편이자 대보(大輔)인 석탈해(昔脫解)에게 왕위를 양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하지만 석탈해가 덕이 많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며 떡을 깨물어 잇금[齒理]을 시험해보자고 하여 이가 많은 유리이사금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라의 왕을 가리키는 이사금이라는 왕호도 이 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는 이질금(尼叱今)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는 김대문(金大問)을 인용해서 이사금은 잇금(齒理)을 나타내는 말로 남해차차웅이 자신이 죽은 뒤에 박씨와 석씨 가운데 나이가 많은 자가 왕위를 이으라고 했고, 뒷날 김씨 성이 흥기하면서 세 성씨 가운데 나이 많은 자를 골라 왕위를 잇도록 했기 때문에 왕을 이사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왕위에 오른 유리이사금은 농업을 장려하며 백성의 삶을 어질게 보살폈다. 《삼국유사》에는 유리이사금 때에 쟁기와 보습, 수레 등의 농기구가 제작되었고, 얼음창고에 저장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유리이사금이 28년(유리 5) 나라를 돌아보다가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는 노파를 보고는 자신을 질책하면서 관리들을 시켜 홀아비와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 등을 보살피고 부양하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자 이웃 나라에서도 백성들이 몰려들었으며,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유리이사금은 오늘날 추석의 기원이 되는 가배(嘉俳)의 풍습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는 6부를 둘로 나누어 왕녀(王女) 2인으로 하여금 각 부의 여인들을 통솔해 해마다 음력 7월 16일부터 한 곳에 모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길쌈을 하게 했다. 그리고 음력 8월 15일에 심사해서 적게 한 쪽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대접하게 했다. 이때 노래와 춤, 놀이 등을 함께 즐겼는데, 진 쪽에서 한 명의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며 탄식하는 소리로 ‘회소 회소’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회소곡(會蘇曲)’이라는 노래가 나왔다고 한다.
유리이사금은 신라의 행정체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비하고자 32년(유리 9) 6부의 명칭을 바꾸고 각 부마다 성(姓)을 내렸다. 양산부(楊山部)는 양부(梁部)로 고치고 이(李)씨로 했고,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로 바꾸고 최(崔)씨로 했다.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 모량부(牟梁部)라고도 한다]로 바꾸고 손(孫)씨 성을 주었고, 간진부(干珍部)는 본피부(本彼部)로 고치고 정(鄭)씨 성을 주었다. 가리부(加利部)는 한기부(漢祇部)로 고치고 배(裴)씨 성을 주었고,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로 하고 설(薛)씨 성을 주었다. 그리고 관직을 17등급으로 나누고, 1등급부터 각각 이벌찬[伊伐湌,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粲), 서발한(舒發翰), 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한다], 이척찬[伊尺湌, 이찬(伊湌)이라고도 한다], 잡찬[迊湌, 잡판(迊判)이나 소판(蘇判)이라고도 한다], 파진찬[波珍湌, 해간(海干)이나 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한다], 대아찬(大阿湌), 아찬[阿湌, 아척간(阿尺干)이나 아찬(阿粲)이라고도 하며 중아찬(重阿湌)에서 사중아찬(四重阿湌)까지 있었다], 일길찬[一吉湌,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한다], 사찬[沙湌, 살찬(薩湌)이나 사돌간(沙咄干)이라고도 한다], 급벌찬[級伐湌, 급찬(級湌)이나 급벌간(及伏干)이라고도 한다], 대나마[大奈麻, 대나말(大奈末)이라고도 하며 중나마(重奈麻)에서 구중나마(九重奈麻)까지 있었다], 나마[奈麻, 나말(奈末)이라고도 하며 중나마에서 칠중나마까지 있었다], 대사[大舍, 한사(韓舍)라고도 한다], 소사[小舍, 사지(舍知)라고도 한다], 길사[吉士, 계지(稽知)나 길차(吉次)라고도 한다], 대오[大烏, 대오지(大烏知)라고도 한다], 소오[小烏, 소오지(小烏知)라고도 한다], 조위[造位, 선저지(先沮知)라고도 한다] 등의 명칭을 사용했다. 1등인 이벌찬에서 5등인 대아찬까지는 오직 진골(眞骨)만 될 수 있었다.
36년(유리 13) 낙랑(樂浪)이 북쪽에서 침범해 신라의 타산성(朶山城)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이듬해 고구려의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18~44)이 낙랑을 멸망시킨 뒤에는 그것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오자 그들을 6부로 나누어 살게 했다. 《삼국유사》에는 이 일을 27년(유리 4)의 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해에 낙랑 사람들이 북대방(北帶方)의 사람들과 함께 신라로 투항해왔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37년(유리 14) 청도군(淸道郡) 지역에 있던 이서국(伊西國)의 사람들이 신라의 금성(金城)을 공격해왔다는 내용도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40년(유리 17) 화려현(華麗縣)과 불내현(不耐縣) 사람들이 기병을 거느리고 신라 북쪽을 침범해왔으나 맥국(貊國)이 병사를 동원해 곡하(曲河) 서쪽에서 이들을 물리쳐 유리이사금이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는 애용도 전해진다. 맥국은 42년(유리 19) 사냥을 한 새와 짐승을 신라에 선물로 보내오기도 했다. 이 해에 유리이사금은 이서국을 공격해 복속시켰으나, 고구려가 신라를 침범하였다.
유리이사금은 34년 동안 신라를 통치했으나, 그의 재위 말기에 신라에는 여러 가지 변고가 나타났다. 54년(유리 31)에는 혜성이 나타났으며, 56년(유리 33)에는 금성(金城)의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고, 태풍도 닥쳤다. 유리이사금은 57년(유리 34)에 병이 들어 사망했으며, 죽은 뒤에 부친인 남해차차웅과 마찬가지로 사릉원(蛇陵園)에 매장되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두 아들의 재주가 석탈해에 미치지 못하니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라는 유언을 남겼고, 결국 아들들을 대신해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재위 57~80)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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