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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신라 왕조 계보

혁거세거서간[ 赫居世居西干 ]

by 1티어 율쌤 2022.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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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거세거서간[ 赫居世居西干 ] 

 

신라 박씨(朴氏)의 시조이다. 일반적으로 박혁거세(朴赫居世)로 지칭한다. 사로 6촌장(六村長) 세력을 규합하여 사로국(斯盧國)을 세웠으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생애 / 활동사항
『삼국사기(三國史記)』와『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다음과 같은 건국신화(建國神話)가 있다. 

“서기전 69년 3월 1일 당시 사로 6촌(斯盧六村)의 촌장(村長)들이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였다. 그들은 임금을 모시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 때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근처에 신기한 빛이 하늘에서 땅에 닿도록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흰말〔白馬〕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이 하늘로 날아가자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런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동천(東泉)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다. 이 아이가 박혁거세이다. 알의 크기가 박[瓠]과 같아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또한, 그 광채로 인해 이름을 혁거세 혹은 불구내(弗矩內)라고 하였다. 고허촌(高墟村) 촌장인 소벌공(蘇伐公: 蘇伐都利)이 데리고 가서 길렀다. 6촌의 촌장들은 신비롭고 기이하게 여겨 존경하였다. 나이 13세가 되자 이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 때 왕의 칭호는 거서간 또는 거슬한(居瑟邯)이라 하였다. 또한, 나라이름을 서나벌(徐那伐)·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사로(斯盧)라 하였다. 그리고 서기전 53년(혁거세거서간 5) 알영(閼英)을 비(妃)로 맞아들였다.”

이 건국신화는 성읍국가(城邑國家) 단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즉, 6촌장이란 이미 신라의 개국(開國) 이전에 나뉘어 살았던 고조선(古朝鮮)의 유민들이었다. 따라서, 토착 세력을 압도한 유이민(流移民) 박씨 집단을 상정할 수 있다.

박씨 집단은 말〔馬〕및 천신하강(天神下降)의 모티브로 볼 때, 이들은 말을 토템으로 하는 천신족(天神族)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혁거세·불구내 등이 광명을 의미한다는 데서도 그들의 ‘태양숭배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이미 개국연대 이전부터 경주 지역에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개국연대가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前漢 孝宣帝 五鳳 元年 甲子: 서기전 57)라는 설은 문제가 있다. 

첫째,『삼국사기』가 신라중심의 관점에서 신라의 건국을 고구려(高句麗)나 백제(百濟)보다 먼저 잡은 것이 그러하다. 둘째, 갑자년이라는 간지(干支)가 참위설(讖緯說)의 갑자혁명설(甲子革命說)에 입각한 듯하기 때문이다. 

혁거세는 서기전 37년 경주에 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또한, 서기전 32년에는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이 단계의 사로국은 대체로 경주평야를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서기전 28년낙랑(樂浪)이 침범해 왔다. 그러나 국경에 있는 백성들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으며 곡식더미가 들에 즐비한 것을 보고 ‘도덕(道德)의 나라’라 하고 스스로 물러갔다. 서기전 20년마한(馬韓) 왕이 공물(貢物)을 보내지 않는다고 노하자, 그 해에 호공(瓠公)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냈다. 

서기전 19년 마한 왕이 죽자 사신을 보내어 조위(弔慰)하였다. 서기전 5년에는 동옥저(東沃沮)에서 보낸 사신이 와서 말 20필을 바치기도 하였다. 승하한 뒤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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