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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

을사의병[ 乙巳義兵 ]

by 1티어 율쌤 2022. 1. 28.

을사의병[ 乙巳義兵 ]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따라 독립국으로서의 자주권을 상실하게 되자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양반유생과 민중이 일으킨 항일 무력투쟁. 

조선 말기 일제 침략 과정에서 일어난 의병투쟁은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눈다.  제1기 의병은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살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 등을 강제 시행한 을미개혁(乙未改革) 이후의 을미의병(乙未義兵)이며, 제2기 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따라 일어난 을사의병(乙巳義兵)이며, 제3기는 1907년 한일신협약 및 군대해산에 자극받아 일어난 정미의병(丁未義兵)이다. 

을미의병은 친일정권이 붕괴되고 을미개혁이 중지되면서 의병활동도 진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반일감정은 잠재되어 있어 언제라도 의거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위해 무력을 앞세워 을사늑약(乙巳勒約)(당시 ‘을사보호조약’이라는 이름으로 체결)을 강제 체결하고(1905. 11. 17)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그 결과 민족의 저항은 여러 가지 형태의 항일운동으로 나타났다. 고위 관료들은 정부에 조약을 파기할 것을 간청하는 상소를 하였으나,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 의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장지연은 신문 사설을 통해 비분을 전하였고, 시민들은 조약을 체결한 대신들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항일의병이 봉기하였다. 이것이 을사의병이다. 특히, 1906년에 의병활동이 활발하여 병오의병(丙午義兵)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을사의병이 가장 먼저 봉기한 지역은 을미의병 때도 가장 활발하였던 원주·제천·단양 등 중부 일대였다. 을미의병 때 유인석(柳麟錫) 의병진에서 활약한 원용석(元容錫)·박정수(朴貞洙) 등이 1905년 9월에 원주 동쪽 주천에서 각지에 격문을 보내 사람을 모아 의병대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 의병대는 활동도 개시하기 전에 원주 진위대와 일진회의 급습을 받아 해체되고 말았다. 단양에서도 정운경(鄭雲耕)이 단양·제천·영춘 등지의 의병 300~400명을 규합하였으나, 역시 원주 진위대의 습격으로 정운경·박정수 등 주모자는 붙잡히고 의병은 해산당하였다. 이와 같이 성공하지 못한 의병대도 있었다. 
 
을사의병 중 제일 규모가 크고 성공적으로 치열한 항전을 벌인 의병진은 민종식(閔宗植)·안병찬(安炳瓚) 등이 주축이 된 홍주(洪州) 의병이었다. 제1차 홍주의병은 홍주성을 활동 근거지로 삼기 위하여 성을 공격하였으나, 안병찬 등 중심 인물들이 체포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를 이어 전 참판 민종식이 이용규(李容圭)·이세영(李世榮)·채광묵 등과 함께 조직한 제2의 홍주 의병은 대포 75문을 보유할 정도로 강력하여, 지방 경찰력으로는 제압할 수가 없었다. 그해 5월 19일 마침내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3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 기관총 등을 동원하여 3일간의 격전을 벌인 끝에 겨우 의병을 제압할 수 있었다. 홍주성 전투는 비록 실패하였으나 을사의병 가운데 가장 큰 전과를 거두었다. 

다른 의병으로 유명한 것은 전 참찬 최익현(崔益鉉) 의병진이다. 그는 대원군 시대부터 유림의 대표로 배일사상이 강한 강직한 관리로 널리 알려졌고, 위정척사사상에 따라 국가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직언 상소를 하여왔던 인물이어서, 그의 의병 조직은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태인군수이던 임병찬(林炳瓚)도 합세하여 거의하였다. 1906년 6월 전라북도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거한 최익현 의병진은 정읍·순창을 지나 담양 방면으로 향하던중, 전주·남원 진위대와 대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기 위하여 교전을 회피하였다. 진위대는 오히려 이 틈을 공격하여 의병진은 참패를 당하였다. 그 결과 최익현 이하 임병찬·고석진(高石鎭) 등 주모자 13명이 붙잡힘으로써 의병진은 해체되었고, 최익현은 다음 해에 일본 쓰시마[對馬島]로 이송되어 그들의 핍박을 당하다 “일본인이 주는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단식 항거하다 아사 순국하였다. 

영남지역의 의병진으로는 경북 평해(平海)·영해(寧海)일대에서 일어난 신돌석(申乭石) 의병진과 영천(永泉)에서 일어난 정환직(鄭煥直)·용기(鏞基) 부자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있다. 의병은 보통 유학자나 관료출신이 지도하였다. 그러나 신돌석은 평민 신분으로 의병을 모아 1906년 4월 거의한 뒤 산남의진과 서로 호응하면서 동해안 여러 곳에서 항일전을 폈다. 한 때 그 수가 3,000여명에 달하였고, 특히 규율이 엄하고 유격전술에 뛰어나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정용기를 중심으로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이 영남일대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의병진을 구성하였다. 이 의병진은 한 때 의병장 정용기가 붙잡히는 큰 고난도 겪었지만, 청하·진보·청송 등지에서 활약하면서 의성·경주·신령 등지의 여러 의병진을 아우르며 지속적인 항쟁을 전개해나갔다. 

그 밖에 경기도에서 죽산·안성의 박석여(朴昔汝), 양평·여주의 이범주(李範疇)가 거의하였고, 강원도에서 양구의 최도환(崔道煥), 홍천의 박장호(朴長浩)가 일어났으며, 공주의 이세영(李世永)·김덕진(金德鎭), 임실의 강재천(姜在天), 장성의 기우만(奇宇萬), 광양의 백락구(白樂九), 남원의 양한규(梁漢奎), 예안의 김도현(金道鉉), 경주의 유시연(柳時淵), 영양의 김순현(金淳鉉), 울진의 김현규(金顯奎) 의병진 등이 큰 활약을 펼쳤다. 

을사의병(1905)은 을미의병(1895)이 해산된 뒤 은거중이던 대부분의 의병장이 구국결사의 신념을 새롭게 다지면서 의병을 다시 규합하여 전국적으로 대일항전을 재개하였던 것이다. 또한 을미의병 당시 항일의지는 있었으나 미처 거의하지 못한 유생과 지사들이 을사의병에 대거 가담하였다. 이와 같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된 을사의병은 1907년 군대해산 이후에는 해산된 군인까지 합세하여 보다 확대 발전된 구국항일전인 정미의병(丁未義兵)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