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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역사와 인물

이육사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

by 1티어 율쌤 2022.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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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 李陸史 ]


일제 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청포도(靑葡萄)》, 《교목(喬木)》 등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호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 또는 원삼(源三), 개명은 활(活). 경북 안동(安東) 출생.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6년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하였고,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尹崑崗) ·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이육사가 죽은 후, 1년 뒤에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그 후, 1946년 신석초를 비롯한 문학인들에 의해 유고시집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고, 1968년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에 육사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다. 

이육사의 시는 독립에 대한 의지와 항일 투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언어적 정제를 통해 화려한 상징과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정신적 의지를 드러낸다. 또한, 베이징 유학 시절에 받은 중국 문학의 영향 때문에 그의 시에서는 유교적인 태도도 나타난다. 이러한 부분이 기존의 저항시들이 가지고 있었던 시적인 면모와 다른 부분이며, 한편으로는 정신적인 태도로 일관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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