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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

3·1운동[ 三一運動 ]

by 1티어 율쌤 2022. 1. 31.

3·1운동[ 三一運動 ]

 

1919년 3월 1일 일본 식민지 지배하의 한국에서 일어난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한다.

손병희를 대표로 하여, 천도교·기독교·불교의 지도적 인사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마침 고종황제와 인산(因山, 국장)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모일 것을 예 측, 3월 1일 정오를 기해 파고다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인쇄물을 뿌리고 시위운동을 펴기로 했다. 또 각 지방에도 미리 조직을 짜고 독립선언서와 함께 운동의 방법·날짜 등을 전달해두었다. 독립선언서와 일본정부에 대한 통고문, 미국대통령·파리 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보낼 의견서는 최남선이 기초하고, 비용과 인쇄는 천도교 측이 맡아, 2월 27일 밤 보성인쇄소에서 2만 1천 장을 인쇄, 은밀히 전국 주요도시에 배포했다. 손병희 이하 33명의 민족 대표는 3월 1일 오후 2시 정각 인사동과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한용운이 독립선언서의 낭독을 끝내자 만세삼창을 부른 후 경찰에 통고하여 자진 체포당했다. 

한편, 파고다공원에는 5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정재용(鄭在鎔)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후 시위에 나섰다. 이들의 시위행렬에 수만의 시민들이 가담함으로써 서울시내는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게 되고, 만세운동은 삽시에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오후 6시 진남포·선천·안주·의주·원산·함흥·대구 등지에서 시위가 벌어졌으며, 다음날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와 시위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서울에서는 3일의 국장 당일에만 잠잠했을 뿐 매일 가두시위가 벌어졌으며, 학생은 휴교, 상인은 철시, 노동자는 파업, 관리는 퇴직으로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에 총독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 비무장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 군중에 대해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부상·투옥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화수리·정주·맹산·강서·대구·밀양·합천 등 많은 곳에서 일제에 의해 잔인한 집단학살이 저질러지고, 유관순의 참살 등이 자행되었으며, 민족대표를 위시한 지도자 47명은 내란죄로 기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