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공주와 옹주의 차이를 알고 계신가요? 덕온공주와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잠시 알아보고 뜻을 전할까 합니다.
덕온공주 [ 德溫公主 ]
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셋째 딸입니다. 16세에 남녕위 윤의선과 결혼하였다가 23세에 죽었습니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동에 있습니다.
덕혜옹주 [ 德惠翁主 ]
1912년 고종의 고명딸로 태어났습니다. 1925년 일본으로 끌려가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다케유키와 강제 결혼하였습니다. 조발성치매증을 앓았는데 결혼 후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혼, 딸의 죽음 등 비극을 겪었으며 1962년 귀국해서도 순탄치 않은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공주와 옹주
아들의 경우 왕비에게서 태어나면 대군, 후궁에게서 태어나면 군 이라고 불렀으며,
딸의 경우 왕비에게서 태어나면 공주, 후궁에게서 태어나면 옹주라고 불렀다.
공주 [ 公主 ]
공주(公主)란 말은 주나라 선왕(宣王) 때 처음 쓰였다. 선왕은 딸을 시집보내면서 이 혼례를 제후인 공(公)에게 맡겼는데, ‘공(公)’은 혼례를 주관한 사람을 가리키고, ‘주(主)’는 공(公)이 받들어 모신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시집을 가는 왕이나 황제의 딸을 가리키게 되었고, 그것도 왕후 사이에 났느냐, 비빈 사이에 났느냐를 구분하여 공주와 옹주로 나누었다. 그러므로 옹주(翁主)는 후궁이 낳은 딸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이전부터 공주라는 말을 사용했다. 당시 공주로 불렸던 이만 보더라도 ‘자명고’의 주인공인 낙랑공주와 고구려의 온달에게 시집간 평강공주, 「서동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 등이 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공주라는 호칭은 고려 문종 때의 관제에 의하면 정1품이었는데, 법제화되지는 않았다. 그후 공양왕 때 도평의사사의 건의에 따라 왕의 딸을 공주라 불렀으나, 조선 초기까지도 제도가 미비하여 공주, 왕녀, 궁주(宮主), 옹주 등 여러 가지로 불렀으며, 왕의 후궁도 공주라 칭했다. 그후 성종 때에 와서 『경국대전』 「외명부조(外命婦條)」에서 제도화시켜, 왕의 정실이 낳은 딸을 ‘공주’라 하고, 후궁이 낳은 딸을 ‘옹주’로 구별했다.
옹주 [ 翁主 ]
공주와 함께 귀한 신분으로서 품계를 초월한 외명부이다. 옹주라는 명칭은 오랜 변천 끝에 여러 가지로 사용되어 오다가 ≪경국대전≫에는 왕의 서녀(庶女)만 칭하도록 규정되었다. 중국 한(漢)나라에서는 제왕(諸王) 또는 제후의 딸을 옹주라 칭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완비된 제도가 없었고, 문종 때 비로소 미비하나마 내명부와 외명부가 구별되어 제정되었다. 옹주라는 명칭은 충선왕 때부터 사용되었으며, 왕의 후궁을 칭하기도 하였다. 공양왕 때는 중국의 옛날 제도를 참작해 왕의 딸을 궁주라 하고, 왕자의 정실부인, 왕의 동성자매·질녀, 종친들의 정실부인, 그리고 왕녀까지도 포함시켜 옹주라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해 대군의 부인, 왕의 후궁, 왕의 서녀, 개국공신의 어머니와 처, 왕세자빈의 어머니, 종친의 딸 등을 두루 옹주라 칭하였다.
그러나 세종대 이후 왕의 서녀만 옹주라 칭했고, 그 외는 고유한 다른 명칭들로 바뀌어갔다. 대우는 공주보다는 한 등급 낮으나, 왕의 딸로서 존귀한 지위에 있었으므로 국가로부터 많은 은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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