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明宗 ]
고려의 제19대 임금(재위 1170∼1197)으로 1170년 무신정변 이후 정중부 등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1197년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었다.
성(姓)은 왕(王), 이름(名)은 호(晧)이다. 초명(初名)은 흔(昕)이며 자(字)는 지단(之旦)이다. 시호(諡號)는 황명광효대왕(皇明光孝大王), 묘호(廟號)는 명종(明宗)이다. 고려 17대 인종(仁宗, 재위 1122~ 1146)과 공예왕후 임씨(恭睿王后 任氏, 1109~1183)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8대 의종(毅宗, 재위 1146~1170)의 동생이다. 강릉공(江陵公) 김온(金溫)의 딸인 의정왕후[義靜王后, 강종 즉위 이후에 광정태후(光靖太后)로 추존] 김씨(金氏)와의 사이에서 22대 강종(康宗)으로 즉위하는 태자 숙(璹, 1152~1213)과 연희궁주(延禧宮主), 수안궁주(壽安宮主) 등의 자녀를 두었다. 후궁(後宮)들과의 사이에서도 선사(善思), 홍기(洪機), 홍추(洪樞), 홍규(洪規), 홍균(洪鈞), 홍각(洪覺), 홍이(洪貽) 등의 소군(小君)을 낳았으며, 이들은 모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1148년(의종 2) 익양후(翼陽侯)로 책봉되었으며, 1170년 무신정변을 일으키고 의종(毅宗)을 거제도로 유폐시킨 정중부(鄭仲夫, 1106~1179), 이의방(李義方, ?∼1174), 이고(李高, ?~1171) 등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명종은 정중부를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삼았고, 무신들을 공신(功臣)으로 대우하였다. 무신들은 중방(重房)을 중심으로 국정을 장악하였고, 모든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명종이 집권한 뒤에 권력을 장악한 무신들 내부의 갈등이 치열해졌는데, 1171년 이의방(李義方)과 채원(蔡元)은 이고(李高)를 제거하였고, 뒤이어 채원(蔡元)도 이의방(李義方)에게 살해되었다. 무신들의 횡포와 전횡이 심하자 1173년과 1174년 김보당(金甫當), 조위총(趙位寵)이 각각 동계(東界)와 서경(西京)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사회 혼란이 계속되면서 각지에서 농민 반란도 자주 일어났다. 1174년 이의방(李義方)은 정중부(鄭仲夫)와 그의 아들인 정균(鄭筠)에 의해 살해되었고, 1179년(명종 9)에는 경대승(慶大升, 1154~1183)이 정중부(鄭仲夫) 일파를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경대승(慶大升)은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을 고루 등용하며, 조정의 질서를 회복하려 했으나 1183년 5년만에 병사(病死)하였다. 경대승이 죽은 뒤, 경주로 달아나 있던 이의민(李義旼, ?~1196)이 개경으로 올라와 실권을 장악하였다.
1196년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이 이의민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명종에게 봉사10조(封事十條)의 국정개혁안을 제출하였다. 1197년(명종 27) 최충헌(崔忠獻)은 명종을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인 평량공(平凉公)을 20대 신종(神宗, 재위 1197~1204)으로 즉위시켰다. 명종은 창락궁(昌樂宮)에 유폐되었으며, 태자 숙(璹)도 강화도로 쫓겨났다. 명종은 1202년 병으로 죽었으며, 장단군(長湍郡)의 지릉(智陵)에 매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