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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백제 왕조 계보

무왕[ 武王 ]

by 1티어 율쌤 2022.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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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 武王 ]  

 

요약 백제 제30대 왕으로 신라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재위 600∼641)

성은 부여(夫餘), 이름[諱]은 장(璋)으로 《수서(隋書)》에는 여장(餘璋)이라고 적혀 있다. 시호는 무왕(武王)이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무강왕(武康王)·헌병왕(獻丙王)이라고도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서들에는 29대 법왕(法王, 재위 599∼600)의 아들이라고 나타나 있지만,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北朝)의 역사를 기록한 《북사(北史)》에는 27대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598)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위덕왕과 무왕 사이에 있었던 28대 혜왕(惠王, 재위 598~599)과 29대 법왕의 재위기간이 합해도 3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짧았기 때문에 나타난 표현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무왕이 풍채가 뛰어나고 뜻과 기상이 호방하고 걸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600년 법왕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했는데, 재위 기간에 신라(新羅)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래서 신라와는 계속해서 갈등 관계에 있었는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602년(무왕 3)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포위해서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636년(무왕 37) 독산성(獨山城) 전투까지 10여 차례 이상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침공하였다. 특히 623년(무왕 24) 이후에는 거의 매년 신라와 전투가 벌어졌으며, 627년(무왕 28)에는 무왕 자신이 군사를 이끌고 웅진(熊津)에 머무르며 신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당(唐)나라의 개입으로 신라에 대한 대규모 정벌은 실현되지 못했다. 

고구려와도 갈등 관계에 있었는데, 607년(무왕 8)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송산성(松山城)을 침공하고 석두성(石頭城)을 함락시켜 3천여 명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기도 했다. 무왕은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한 수(隋)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해서, 그해에 연문진(燕文進)과 왕효린(王孝隣) 등을 사신으로 보내 양제(煬帝)에게 고구려 정벌에 나설 것을 요청하였다. 611년(무왕 12)에는 수나라와 사신을 주고받으며 고구려 침공에 대해 의논했는데, 수나라는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 석률(席律)을 백제로 보내 고구려 침공 작전을 조율하기도 했다. 그러나 612년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 침공에 나섰을 때 백제는 수나라를 돕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고구려 공격에 나서지는 않았다. 이는 신라의 침공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 뒤 백제는 고구려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618년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唐)나라가 건국된 뒤로는 해마다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며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왜(倭)와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서 관륵(觀勒)을 보내 천문·지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하기도 했다. 

무왕은 재위 기간에 신라와의 접경 지역에 여러 성들을 쌓으며 국방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각산성(角山城, 605년), 적암성(赤嵒城, 611년), 마천성(馬川城, 632년) 등이 그의 재위 기간에 새롭게 쌓아지거나 보수되었다. 왕권 강화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을 대대적으로 중수하기도 했는데, 630년(무왕 31)에 사비(泗沘)의 궁궐을 중수했으며, 634년(무왕 35)에는 궁궐 남쪽에 큰 연못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그해에 위덕왕 때에 창건된 왕흥사(王興寺)의 건립을 완성하였다. 무왕은 재위 42년째인 641년 3월에 죽었고, 그의 맏아들인 의자왕(義慈王, 재위 641~660)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무왕과 관련된 서동설화(薯童説話)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무왕은 과부인 어머니와 연못의 용과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마를 캐어 생계를 유지해 서동(薯童)이라고 불렸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의 도읍인 서라벌로 가서 선화공주가 밤마다 남모르게 서동과 어울리고 있다는 노래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선화공주가 궁궐에서 쫓겨나 귀양을 가게 되자 그녀를 데리고 백제로 와서 결혼했으며, 어렸을 때 마를 캐면서 발견해 모아두었던 황금으로 인심을 얻어 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무왕 때에 백제가 신라와 계속해서 갈등 관계에 있었던 것을 보면 당시 신라와 백제가 통혼(通婚) 관계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고대부터 전승된 설화에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뒤섞이며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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