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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역사와 인물

벤저민 프랭클린[ 1706 ~ 1790 ]

by 1티어 율쌤 2022.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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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프랭클린
[ Benjamin Franklin ]


미국의 정치가·외교관·과학자·저술가. 신문사의 경영자, 교육문화활동, 자연과학분야에서 전기유기체설을 제창하는 등의 활동과, 정치·외교적인 분야에서도 활약하였다. 그는 평생을 통하여 자유를 사랑하고 과학을 존중하였으며 공리주의에 투철한 전형적인 미국인으로 일컬어진다.

필명 Richard Saunders. 보스턴 출생. 아버지가 경영하는 양초와 비누 제조업을 돕다가 형이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뉴잉글랜드 커런트 New England Courant》지(紙)의 발행을 도왔다. 1723년 형과 의견이 맞지 않아 보스턴을 떠나 필라델피아로 갔고, 1724년 런던으로 건너갔다가 2년 후 귀국하였다.

1729년 《펜실베이니아 가제트 Pennsylvania Gazette》지의 경영자가 되었고, 얼마 후 편집까지도 담당, 유명한 신문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전신인 필라델피아 아카데미의 창설, 도서관의 설립, 미국철학협회의 창립 등 폭넓은 교육문화활동에도 전념하였다.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가져 지진의 원인을 연구해서 발표하는가 하면, 고성능의 ‘프랭클린난로’라든가 피뢰침을 발명하기도 하였다. 1752년 연(鳶)을 이용한 실험을 통하여 번개와 전기의 방전은 동일한 것이라는 가설을 증명하고, 전기유기체설(電氣有機體說:electric fluid theory)을 제창하였다.

1753년 영국의 로열 소사이어티(Royal Society) 회원으로 선정되었고, 코플리상(賞)을 받았다. 그해 전(全)식민지 체신장관 대리가 되어 우편제도를 개선하였고 1754년 올버니회의에 펜실베이니아대표로 참석, 최초의 식민지연합안을 제안하였다. 1757년 펜실베이니아의 이익을 위하여 교섭을 벌일 목적으로 영국에 파견되어 식민지에 자주과세권을 획득하고 귀국하였다.


1764년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인지조례(印紙條例)의 철폐를 성공시켰다. 1775년 귀국하여 제2회 대륙회의의 펜실베이니아대표로 뽑혔고 1776년 독립선언 기초위원에 임명되었다. 그해 프랑스로 건너가 아메리카-프랑스동맹을 성립시키고, 프랑스의 재정원조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1783년 파리조약에는 미국대표의 일원이 되었다.

1785년 귀국, 펜실베이니아 행정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1787년 헌법회의에는 펜실베이니아대표로서 참석하였는데, 각 주 사이(특히 큰 주와 작은 주 사이)의 이익 대립을 조정, 헌법제정에 진력하였으며 새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 죽었다. 그는 평생을 통하여 자유를 사랑하고 과학을 존중하였으며 공리주의(功利主義)에 투철한 전형적인 미국인으로 일컬어진다.

저서 중에서도 상식철학과 뛰어난 기지와 경구가 넘치는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 Poor Richard's Almanac》은 많은 사람들에게 애독되었으며, 프랭클린 자신도 “나의 출판업 중에서 가장 이익을 많이 낸 작품”이라고 말하였다. 사후에 출판된 《자서전 Autobiography》은 미국 산문문학 중 일품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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