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왕[ 毗有王 ]
백제의 제20대 왕으로 신라ㆍ왜ㆍ중국 남조의 송(宋) 등과 우호관계를 형성하여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맞서려 했다. (재위 427∼455)
성은 부여(夫餘)이고 이름이나 시호 등은 전해지지 않는다. 《송서(宋書)》에는 백제왕 ‘여비(餘毗)’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이신왕(久尒辛王)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전지왕(腆支王)의 서자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어느 것이 사실이지는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비유왕(毗有王)은 자태와 용모가 아름답고 언변이 뛰어나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고 한다. 그는 427년 12월 구이신왕이 죽은 뒤에 왕위에 올랐고, 즉위 이듬해인 428년에는 4부(四部)를 순시하며 가난한 백성들에게 가난의 정도에 따라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429년에는 상좌평(上佐平) 여신(餘信)이 죽자 해수(解須)를 상좌평으로 삼아 군정(軍政)과 내정(內政)을 맡겼다.
비유왕 때에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재위 413~491)의 남하정책에 맞서기 위해 신라(新羅)와 왜(倭), 중국 남조(南朝)의 송(宋) 등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428년(비유왕 2) 왜국에서 50여명에 이르는 사신 일행이 백제로 왔으며, 백제는 433년(비유왕 7) 7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듬해 신라와 백제는 서로 예물을 주고받으며 우호관계를 형성했다. 그리고 백제는 429년(비유왕 3), 430년(비유왕 4), 440년(비유왕 14)에 중국 남조의 송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이는 중국 남북조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형성하고 남하정책을 추진하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유왕은 29년 동안 왕위에 있다가 455년 9월에 사망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비유왕의 재위 기간에 백제에서 자연재해가 잇따라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429년(비유왕 3)에는 지진이 일어났고 기와가 날아갈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었다. 433년(비유왕 7)에는 봄과 여름에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심하게 들었다. 447년(비유왕 21)에는 가뭄 때문에 곡식이 익지 않아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을 피해 신라 땅으로 건너갔고, 454년(비유왕 28)에는 메뚜기 떼가 발생해 곡식에 큰 해를 입혀 흉년이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비유왕이 죽기 직전에는 한강에 검은 용이 나타나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날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유왕이 죽은 뒤에 맏아들인 개로왕(蓋鹵王)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비유왕이 죽은 뒤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해왔으나, 백제는 신라의 지원을 받아 고구려 군을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비유왕의 재위 기간에 형성된 신라와의 우호 관계를 기반으로 고구려의 남하를 막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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