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왕[ 腆支王 ]
성은 부여(夫餘), 이름은 영(映)으로 《양서(梁書)》에는 여영(餘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직지왕(直支王)이라고도 하며,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王曆)’ 편에서는 진지왕(眞支王)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중국의 《송서(宋書)》 등에는 부여전(夫餘腆)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전지왕(腆支王)은 백제 17대 아신왕(阿莘王, 재위 392~405)의 맏아들로 태어나 394년(아신왕 3) 태자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재위 391∼413)에게 잇따라 전투에서 패한 백제가 왜국(倭國)과 우호관계를 맺음에 따라 397년(아신왕 6) 볼모로 왜국으로 건너갔다. 405년 아신왕이 죽자 숙부인 훈해(訓解)가 섭정이 되어 그의 귀국을 기다렸으나 아신왕의 막내 동생인 설례(碟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을 자처하였다. 전지왕이 왜병 1백 명의 보호를 받으며 나라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한성(漢城) 사람인 해충(解忠)이 이 사실을 알려주며 섣불리 나라로 들어서지 말 것을 당부하였고, 전지왕은 왜병의 호위를 받으며 바다의 섬에 머물렀다. 그 뒤 백제의 백성들이 설례를 죽이고 그를 맞이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다.
왕위에 오른 전지왕은 이듬해 자신의 즉위를 도운 해충(解忠)을 달솔(達率)로 임명하고 한성(漢城)에서 벼 1천석을 수조(收租)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407년(전지왕 3)에는 이복동생인 여신(餘信)을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임명하고, 해씨(解氏)를 중용하여 해수(解須)를 내법좌평(內法佐平), 해구(解丘)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임명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이들이 모두 “왕의 친인척이었다(皆王戚也)”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전지왕이 해씨(解氏)와 일정한 혈연관계나 혼인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408년(전지왕 4) 전지왕은 군사(軍事)와 정사(政事)를 총괄하는 상좌평(上佐平)의 직위를 신설하여 여신을 상좌평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남하를 막기 위해 417년 동북 2부(東北二部)의 15세 이상 백성들을 동원해 사구성(沙口城)를 쌓고, 해구로 하여금 이를 감독케 했다. 동진(東晉)·왜(倭) 등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즉위 이듬해인 406년 동진으로 사신을 보냈으며, 416년(전지왕 12)에는 동진(東晉)의 안제(安帝)가 백제로 사신을 보내오기도 하였다. 왜에서도 409년(전지왕 5) 사신을 파견해 야명주(夜明珠)를 보내왔으며, 418년(전지왕 14)에는 백제에서 왜로 사신을 파견해 백면(白綿) 10필을 보냈다.
전지왕은 420년(전지왕 16) 봄 3월에 사망했다. 그가 팔수부인(八湏夫人)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구이신(久尒辛)이 그의 뒤를 이어 백제 19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구이신왕을 계승한 백제 20대 비유왕(毗有王)이 전지왕의 손자인지 아들인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사기》는 구이신왕의 아들로 알려진 비유왕이 전지왕의 서자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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