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신왕[ 阿莘王 ]
성은 부여(扶餘)이며, 아방왕(阿芳王)이라고도 한다. 백제 제15대 침류왕(枕流王, 재위 384~385)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왕비 진씨(眞氏)이다. 그러나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침류왕의 아들이 아니라 제16대 진사왕(辰斯王, 재위 385~392)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왕비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며, 전지왕(腆支王, 재위 405~420)과 여신(餘信) 등의 자녀가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아신왕(阿莘王)이 뜻과 기풍이 호방하고 매사냥과 승마를 좋아했으며, 한성(漢城)의 별궁(別宮)에서 태어났을 때에는 밤에 신비로운 광채가 환하게 비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침류왕 때에 태자로 봉해졌으나 385년(침류왕 2) 겨울 부왕인 침류왕이 죽었을 때에는 아직 나이가 어렸으므로 숙부인 진사왕이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러다 392년(진사왕 8) 겨울에 구원(狗原)에서 사냥을 하던 진사왕이 행궁에서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아신왕이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의 ‘난타벽제(難陀闢濟)’ 조에는 아신왕이 부왕인 침류왕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숭상해 왕위에 오르자마자 왕명으로 불법(佛法)을 섬기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위에 오른 아신왕은 393년(아신왕 2) 정월에 시조인 동명왕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남쪽의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도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외삼촌인 진무(眞武)를 좌장(左將)으로 삼아 군사에 관한 업무를 맡겼다. 당시 고구려의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3)은 392년(진사왕 8) 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고, 그해 가을에 4만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해 석현성(石峴城) 등 한강 이북의 10여개의 성을 점령했으며 겨울에는 해상교통의 요지인 관미성(關彌城)도 점령했다. 아신왕은 393년 가을에 진무로 하여금 관미성을 포위해 공격하게 했으나 군량의 수송로를 확보하지 못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했다.
394년(아신왕 3) 맏아들인 전지(腆支)를 태자로 삼았으며, 이복동생인 홍(洪)을 내신좌평(內臣佐平)에 임명했다. 그리고 가을에는 수곡성(水谷城) 아래에서 다시 고구려군과 싸웠으나 패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백제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남쪽 지역에 일곱 개의 성을 쌓았다. 395년(아신왕 4) 가을에도 진무가 이끄는 백제군은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패수(浿水)에서 광개토왕이 직접 이끈 고구려군에 크게 패했다. 그러자 아신왕은 겨울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청목령(靑木嶺)까지 나아갔으나 큰 눈이 내려 추위에 얼어 죽는 병사가 많이 발생하자 한산성(漢山城)으로 회군했다.
이처럼 신라와 연합한 고구려의 압박에 부닥친 백제 아신왕은 397년(아신왕 6) 왜국(倭國)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인 전지를 일본에 인질로 보냈다. 가을에는 한강 남쪽에서 대규모로 군대를 사열했다. 398년(아신왕 7)에는 진무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사두(沙豆)를 좌장(左將)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한강 이북에 쌍현성(雙峴城)을 쌓았다.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한산(漢山) 북쪽의 책성(柵城)에 병력을 집결시켰으나 그날 밤에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져 진영에서 소리가 나자 이를 불길하게 여긴 아신왕은 공격을 중지시켰다. 아신왕은 399년(아신왕 8) 가을에도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병력과 말을 대규모로 징발했는데, 잇따른 군역(軍役)을 고통스럽게 여겨 많은 사람들이 신라로 이주해 호구(戶口)의 수가 줄었다.
아신왕의 재위 기간에 끊임없이 계속되었던 백제와 고구려의 대립은 400년(아신왕 9) 봄에 중국 후연(後燕)의 모용성(慕容盛)이 고구려를 침공한 뒤부터는 고구려가 여러 해 동안 계속된 후연과의 전쟁에 주력하게 되면서 잦아들었다. 아신왕은 402년(아신왕 11) 큰 가뭄이 들자 횡악(橫岳)에서 직접 기우제를 지냈으며, 그해와 이듬해에는 왜국과 사신을 주고받으며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403년(아신왕 12)에는 신라의 변경 지역을 침공했다.
아신왕은 405년(아신왕 14) 가을에 사망했는데, 태자인 전지가 왜국에 볼모로 가 있었으므로 왕의 둘째동생인 훈해(訓解)가 섭정을 하며 태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왕의 막내동생인 설례(碟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왜왕이 딸려 보낸 1백 명의 호위병력과 함께 귀국하던 태자가 백제의 경계로 들어섰을 때 한성(漢城) 사람인 해충(解忠)이 그를 찾아가 설례가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태자는 왜국 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섬에 머물렀고, 설례가 살해된 뒤에야 왕성으로 들어와 제18대 전지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한편, 《니혼쇼키(日本書紀)》의 일왕 오진(応神) 조에는 아신왕의 이름이 아화왕(阿花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일왕 오진의 재위 3년에 진사왕(辰斯王)이 왕위에 올랐으나 일왕과 갈등을 빚어 왜국에서 기노쓰노노스쿠네(紀角宿禰) 등을 보내자 백제에서 진사왕을 죽이고 아화왕을 왕으로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오진 14년에는 백제 아화왕이 직물을 짜고 옷을 만드는 봉의공녀(縫衣工女)를 보냈으며, 오진 15년에는 경전에 능한 아직기(阿直伎)가 일본으로 건너가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는 내용도 전하고 있다. 아신왕의 태자인 전지는 직지(直支)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가 오진 8년에 일본으로 건너왔으며, 오진 16년에 아화왕이 죽자 백제로 돌아가 왕위에 올랐다고 되어 있다. 또한 직지왕은 오진 25년에 죽고 아들인 구이신(久爾辛)이 왕위에 올랐는데, 오진 39년 봄 2월에는 직지왕이 누이인 신제도원(新齊都媛)을 일본으로 보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그래서 《니혼쇼키》에 등장하는 신제도원도 아신왕의 딸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니혼쇼키》의 기록은 연대 표기가 정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직지왕이 죽은 지 14년 뒤에 자신의 누이를 일본으로 보냈다고 하는 등 맥락이 논리에서 벗어난 부분도 많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을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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