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구수왕[ 近仇首王 ]
성은 부여(扶餘)이며, 이름(諱)은 수(須)라고도 한다. 백제의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왕비 진씨(眞氏)이다. 아이부인(阿尒夫人)을 왕비로 맞이해 제15대 침류왕(枕流王, 재위 384~385)과 제16대 진사왕(辰斯王, 재위 385~392) 등을 낳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근구수왕(近仇首王)은 태자로 있으면서 369년(근초고왕 24)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이 직접 2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치양(雉壤, 지금의 황해도 배천)을 침공해오자 왕의 명령을 받아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근구수왕이 원래 백제인이었으나 왕이 타는 말의 발굽에 상처를 입히고는 처벌이 두려워 고구려로 도망쳤던 사기(斯紀)라는 고구려인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군에 승리를 거두었으며, 수곡성(水谷城, 지금의 황해도 신계) 서북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371년(근초고왕 26) 겨울에는 근초고왕과 함께 3만의 병사들을 이끌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근구수왕은 375년(근초고왕 30) 겨울에 아버지 근초고왕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근구수왕은 376년(근구수왕 2) 진고도(眞高道)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임명해 정사(政事)를 맡겼다. 《삼국사기》에는 진고도에 관해 ‘왕구(王舅)’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왕의 장인’으로 해석하는 학설도 있고, ‘왕의 외삼촌’으로 해석하는 학설도 있다.
근초고왕 때 백제는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도읍을 한성(漢城)으로 옮기고 지금의 황해도 일대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래서 근구수왕의 재위기간에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백제를 잇달아 침공했으며, 신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를 견제하려 했다. 고구려는 375년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376년 겨울에도 백제의 북쪽 변경을 쳐들어왔다. 그러자 근구수왕은 377년(근구수왕 3) 겨울에 군사 3만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했고, 고구려도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다시 백제를 침공해왔다.
재위 당시 고구려와 신라는 중국의 전진(前秦, 351∼394)과 외교관계를 맺어 백제를 견제하려 했는데, 근구수왕은 아버지 근초고왕과 마찬가지로 중국 동진(東晋, 317∼420)과의 외교관계로 이에 맞섰다. 《삼국사기》에는 근구수왕이 379년(근구수왕 5) 봄에 동진에 사신을 보냈으나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사신이 되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양서(梁書)》에는 동진의 태원(太元, 376~396) 연간에 백제왕 수(須)가 노비를 보내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근구수왕의 재위기간에도 백제에는 여러 재해가 많이 발생했다. 《삼국사기》에는 379년 여름에 온종일 흙비가 내렸으며, 380년(근구수왕 6)에는 전염병이 창궐했을 뿐 아니라 여름에는 땅바닥이 갈라지는 변괴가 일어나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82년(근구수왕 8)에는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굶주려 자식까지 내다파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큰 기근이 들었다. 근구수왕은 관청의 곡식을 풀어서 그 빚을 대신 갚아주었다. 384년(근구수왕 10)에는 대궐 뜰에 있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히는 변괴가 발생했다.
근구수왕은 384년 여름에 사망했으며, 그의 맏아들인 침류왕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장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왕릉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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