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왕[ 辰斯王 ]
성은 부여(扶餘)이며, 백제의 제14대 근구수왕(近仇首王, 재위 375~384)의 둘째아들이다. 어머니는 아이부인(阿尒夫人)이며 제15대 침류왕(枕流王, 재위 384~385)의 동생이다. 왕비와 자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제17대 아신왕(阿莘王, 재위 392년~405)이 침류왕의 아들이 아니라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진사왕(辰斯王)이 용감하고 지혜로웠으며 지략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385년(침류왕 2) 겨울에 침류왕이 죽은 뒤 태자가 아직 나이가 어려서 동생인 진사왕이 왕위에 올랐다. 당시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정벌하며 세력을 크게 확대하고 있었는데, 왕위에 오른 진사왕은 386년(진사왕 2) 봄에 15세 이상의 장정을 징발해 청목령(靑木嶺)에서 시작해 북쪽으로는 팔곤성(八坤城),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는 관문에 방어시설을 설치했다. 그리고 387년(진사왕 3)에는 진가모(眞嘉謨)를 달솔(達率)로 삼고, 두지(豆知)를 은솔(恩率)로 삼았다.
진사왕의 재위기간에 백제는 고구려·말갈과 자주 충돌했다. 386년 가을에는 고구려 고국양왕(故國壤王, 재위 384~392)이 군대를 보내 백제를 침공해왔다. 이듬해인 387년(진사왕 3) 가을에 백제는 관미령(關彌嶺)에서 말갈과 전투를 벌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389년(진사왕 5) 가을에 진사왕은 군대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게 했고, 390년(진사왕 6)에는 달솔 진가모를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도압성[都押城, 도곤성(都坤城)이라고도 한다]을 함락시키고 주민 2백여 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진사왕은 공을 세운 진가모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임명하고, 391년(진사왕 7) 봄에는 궁궐을 중수하며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진기한 새와 기이한 화초를 길렀다.
그러나 진사왕의 재위기간에 백제는 점차 고구려에 패하면서 한강 이북 지역의 여러 성들을 빼앗겼다. 391년 여름에는 말갈이 적현성(赤峴城)을 공격해 함락시켰으며, 392년(진사왕 8) 봄에 고구려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다. 신라의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은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인 실성(實聖)을 고구려로 볼모로 보냈다. 이처럼 신라와 동맹을 맺은 고구려의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3)은 392년(진사왕 8) 가을에 4만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의 북쪽 변경을 대규모로 침공해 석현성(石峴城) 등 10여개의 성을 점령했다. 겨울에도 고구려는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해 점령했다. 《삼국사기》에는 관미성이 사방이 절벽이고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광개토왕이 일곱 방면으로 병사를 나누어 공격케 해서 20일 만에 성을 함락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진사왕이 고구려 광개토왕의 용병술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기를 피해서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고을들을 고구려에 빼앗기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사왕은 사냥을 무척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진가모가 고구려 공격에 나선 390년 겨울에도 진사왕은 구원(狗原)에서 7일 동안 사냥을 하였고, 이듬해에도 나라 서쪽의 큰 섬과 횡악(橫岳)의 서쪽에서 사냥을 즐겼다. 고구려가 관미성을 함락시킨 392년 겨울에도 진사왕은 구원에서 10일이 넘도록 사냥을 했고, 끝내 그곳의 행궁에서 죽었다.
진사왕이 죽은 뒤에는 침류왕의 태자였던 아신왕이 왕위에 올랐다. 진사왕의 장례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왕릉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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