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뉴턴
[ Isaac Newton ]
영국의 물리학자·천문학자·수학자·근대이론과학의 선구자. 수학에서는 미적분법을 창시하고, 물리학에서는 뉴턴역학의 체계를 확립했다.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의 울즈소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였고, 어머니는 그가 3세 때 재혼하는 등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1661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칼리지에 입학, 수학자 아이작 배로의 지도를 받아 케플러의 《굴절광학》,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 월리스의 《무한의 산수》 등을 탐독하였으며, 1664년 학사학위를 얻었다. 1664~1666년 페스트가 크게 유행하자 대학이 일시 폐쇄되어 뉴턴도 고향으로 돌아와 대부분의 시간을 사색과 실험으로 보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때 싹트게 된 것이라고 하며, 사과의 일화도 이때 있었던 일이다. 1667년 재개된 대학에 돌아와 이 대학의 펠로(특별연구원)가 되고 이듬해에는 메이저펠로(전임특별연구원)가 됨과 동시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1669년 아이작 배로의 뒤를 이어 루카스교수직에 부임하였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최초의 강의도 광학(그 내용은 뉴턴 사후 《광학강의》로 1729년 출판되었다)이었으며, 초기 연구는 광학분야에서 두드러졌다. 광학에 대해서는 이미 울즈소프 시절부터 스스로 수집 ·정비한 실험기구를 이용해 빛의 분산현상을 관찰하였으며, 특히 굴절률과의 관계에 대하여 세밀히 조사하였다. 한편 망원경 제작도 연구, 굴절광은 스펙트럼을 만들지만, 반사광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기초로, 반사식(反射式)이 수차(收差:色收差도 포함)와 효율면에서 한층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1668년 뉴턴식 반사망원경을 제작했다. 이 망원경은 천체관측 등에 크게 공헌하여 이 공적으로 1672년 왕립협회회원으로 추천되었다. 그 해에 《빛과 색의 신이론(新理論)》이라는 연구서를 협회에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백색광이 7색의 복합이라는 사실, 단색(單色)이 존재한다는 사실, 생리적 색과 물리적 색의 구별, 색과 굴절률과의 관련 등을 논한 것이었다. 1675년 박막(薄膜)의 간섭현상인 ‘뉴턴의 원무늬’를 발견하였으며, 빛의 성질에 관한 연구로 광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광학》(1704)을 저술하였다.
수학에서는 1665년 이항정리(二項定理)의 연구를 시작으로, 무한급수(無限級數)로 진전하여 1666년 유분법(流分法), 즉 플럭션법을 발견하고, 이것을 구적(求積) 및 접선(接線) 문제에 응용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미적분법(微積分法)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성과를 1669년에 논문 《De analysi per aequationes numero terminorum infinitas》으로 발표하였다. 유분법의 전개에 대해서는 《The method of fluxions and infinite series》에 수록되어 있다. 1676년 그와 동일한 미분법을 발견한 라이프니츠와 우선권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는데, 이 무렵부터 그의 사고방식도 실험적 방법에서 수학적 방법으로 그 중점이 옮겨져 스스로를 수학자라고 칭하였다.
뉴턴의 최대 업적은 물론 역학(力學)에 있다. 일찍부터 역학 문제, 특히 중력(重力) 문제에 대해서는 광학과 함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구의 중력이 달의 궤도에까지 미친다고 생각하여 이것과 행성(行星)의 운동(이것을 지배하는 케플러법칙)과의 관련을 고찰한 것은 울즈소프 체류 때 이루어졌다고 한다. 167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당시 사람들도 행성의 운동중심과 관련된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수학적 설명이 곤란해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뉴턴은 자신이 창시해낸 유율법(流率法)을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였다. 1687년 이 성과를 포함한 대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가 출판되었으며, 이로써 이론물리학의 기초가 쌓이고 뉴턴역학의 체계가 세워졌다. 3부로 된 이 라틴어 저서는 간단한 유율법의 설명에서 시작하여 역학의 원리, 인력의 법칙과 그 응용, 유체(流體)의 문제, 태양행성의 운동에서 조석(潮汐)의 이론 등에 이르기까지 계통적으로 논술되어 있다. 또 방정식론 등의 대수학(代數學) 분야의 여러 업적은 《Arithmetica universalis sive de compositione et resolutione arithmetica liber》(1707)로 간행되었다.
1688년 명예혁명 때는 대학 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1691년 조폐국(造幣局)의 감사(監事)가 되었으며, 1696년 런던으로 이주, 1699년 조폐국 장관에 임명되어 화폐 개주(改鑄)라는 어려운 일을 수행하였다. 1703년 왕립협회 회장으로 추천되고 1705년 나이트 칭호를 받았다. 한편 신학(神學)에도 관심을 보여 성서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고대사 해석을 검증하고, 천문학적 고찰을 첨가해 연대기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으며, 런던 교외의 켄싱턴에서 죽었다. 장례는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거행되었고,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그곳에 묻혔다. 근대과학 성립의 최고의 공로자이며, 그가 주장한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라고 하는 역학적 자연관은 18세기 계몽사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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