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왕[ 忠宣王 ]
고려 제 26대 왕(재위 1308~1313). 1298년 왕위에 오르자 정방을 폐지 등 관제를 혁신하고 권신들의 토지를 몰수하였으며 원나라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7개월 만에 폐위되었다가 1308년 충렬왕이 죽자 다시 왕위에 올랐다. 정치에 싫증을 느껴 원나라로 가 전지(傳旨)로써 국정을 처리하였으나 그 와중에도 각염법을 제정하여 사원과 권문세가의 소금 독점에 의한 폭리를 막았다.
초명 원(謜), 휘 장(璋). 자 중앙(仲昻). 충렬왕의 아들. 어머니는 원나라 세조(世祖:忽必烈)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비는 원나라 진왕(晉王) 감마라(甘麻刺)의 딸 계국대장공주(薊 國大長公主), 조인규(趙仁規)의 딸 조비(趙妃), 서원후(西原侯) 영(瑛)의 딸 정비(精妃), 홍규(洪奎)의 딸 순화원비(順和院妃) 등이었다.
1277년(충렬왕 3)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291년(충렬왕 17) 원나라로부터 특진상주국 고려국왕세자(特進上柱國高麗國王世子)의 호(號)를 받았다. 1297년(충렬왕 23) 충렬왕의 총애를 빙자, 횡포가 심하던 궁인 무비(無比)와 환관(宦官) 도성기(陶成器)·최세연(崔世延) 등 40여 명을 죽여 궁중의 기강확립을 기도했다.
이 때 충렬왕은 정치에 흥미를 잃고 있었으므로, 무비 등을 죽인 사건을 계기로 1298년 충선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하자 정방(政房)을 폐하는 등 관제를 혁신하고, 권신이 소유한 광대한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군제(軍制)·세제(稅制)를 정비하고 원나라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로 원나라와의 사이가 원만치 못하였고, 곧 이어 원나라 사신에게 국새(國璽)를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져 선위 7개월 만에 왕위는 다시 충렬왕에게로 돌아갔다. 충선왕은 원나라에 소환되었는데, 이 때 간신 왕유소(王維紹) 등이 충선왕을 아주 폐하고, 그 대신 서흥후(瑞興侯) 전(琠)을 그 후사(後嗣)로 삼으려는 공작을 했다.
1305년(충렬왕 31) 원나라의 성종(成宗)이 죽고, 그 후 황위(皇位) 쟁탈전이 일어났는데, 충선왕은 승자가 된 무종(武宗)을 도왔으므로 그 세력의 힘으로 왕유소 일당과 서흥후 등을 제거하였다. 1308년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졌고, 같은 해에 충렬왕이 죽자,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올랐다. 복위 후 기강의 확립, 조세의 공평, 인재 등용과 공신자제(功臣子弟)의 중용, 농·잠업의 장려, 동성동본 결혼의 금지, 귀족의 횡포 억제 등 과단성 있는 혁신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정치에 싫증을 느껴, 제안대군(齊安大君) 숙(淑)에게 정치를 대행하게 하고 원나라로 가 전지(傳旨)로써 국정을 처리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각염법(榷 鹽法)을 제정하여 소금의 전매를 단행하여, 그때까지 사원(寺院)과 권문세가(權門勢家)에서 소금을 독점하여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았다.
1313년(충선왕 5) 아들 강릉대군(江陵大君:충숙왕)에게 전위하고 계속해서 연경(燕京)에 머물러 만권당(萬卷堂)을 지은 뒤 내외의 고금서적을 수집하였으며, 이제현(李齊賢:고려인) ·조맹부(趙孟頫:원나라 사람) 등 대학자를 초빙하여 고전 연구에 몰두하였다.
1320년(충숙왕 7) 원나라의 환관 임파이엔토그스[任伯顔禿古思]와 틈이 생겨 그의 참소로 토번(吐蕃)에 귀양갔다가 이제현 등의 간절한 소청으로 3년 만에 풀려나 돌아왔다. 1325년(충숙왕 12) 5월에 원나라에서 죽었다. 그림을 잘 그렸으며, 능은 덕릉(德陵:開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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