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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신라 왕조 계보

법흥왕[ 法興王 ]

by 1티어 율쌤 2022.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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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 法興王 ] 

 

신라의 제23대 왕으로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체제를 완성하였다. (재위 514∼540). 

성은 김(金), 이름은 원종(原宗)이다. 11세기 중국 송나라에서 간행한 《책부원구(冊府元龜)》에는 성이 모(募), 이름이 진(秦)이라고 되어 있다. 시호(諡號)는 법흥(法興)이며, 건원(建元, 536〜550)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찬(伊湌) 등흔(登欣)의 딸인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朴氏)이다. 《삼국유사》에는 어머니는 영제부인(迎帝夫人), 왕비는 사축부인(巳丑夫人)이나 파도부인(巴刀夫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법흥왕은 키가 7척에 이르렀으며 성품이 관대하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514년 지증왕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했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 관료체제를 정비하여 왕권강화와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다. 517년(법흥왕 4) 병부(兵部)를 설치하고 1명의 영(令)을 두어 통솔케 하였다. 그리고 19명의 감사지(監舍知)를 두어 각 지방에 설치된 군영들을 지휘, 감독케 했으며, 524년(법흥왕 11)에는 각 군영에 군사당주(軍師幢主)를 두었다. 520년(법흥왕 7)에는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관리의 복색은 붉은색과 자주색 등으로 등급을 표시했는데, 태대각간(太大角干)에서 대아찬(大阿湌)까지는 자주색 옷을 입었으며, 아찬(阿湌)에서 급찬(級湌)까지는 붉은색 옷, 대나마(大奈麻)와 나마(奈麻)는 푸른색 옷, 대사(大舍)에서 선저지(先沮知)까지는 황색 옷을 입었다. 531년(법흥왕 18)에는 상대등(上大等)의 직위를 신설하고 이찬(伊湌) 철부(哲夫)를 상대등으로 임명해 국정을 총괄케 했으며, 536년(법흥왕 23)에는 강화된 왕권을 나라 안팎에 내보이기 위하여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건원(建元) 원년으로 하였다. 538년(법흥왕 25)에는 지방관들에게 가족을 데리고 임지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법흥왕은 외교와 국방에도 힘을 기울여 아라가야와 금관가야 등을 병합하고 신라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518년(법흥왕 5) 주산성(株山城)을 쌓았으며, 521년(법흥왕 8)에는 중국의 양(梁)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교류하였다. 이듬해에는 가야국의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자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보내 결혼시켰으며, 524년(법흥왕 11)에는 직접 남쪽 국경을 순행하며 가야국의 왕과 회견하였다. 이 해에 과거 사벌국(沙伐國)이 있던 지역에 군사를 배치하여 사벌주(沙伐州)를 설치하고, 아찬(阿湌) 이등(伊登)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532년(법흥왕 19)에는 금관가야의 구해왕(仇亥王)이 세 아들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과 함께 항복해오자 금관가야의 옛 땅을 그에게 식읍(食邑)으로 주고 상등(上等)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동원해 아라가야(阿羅伽倻)를 정벌하여 그 지역에 군(郡)을 설치했다. 이로써 신라는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법흥왕은 528년(법흥왕 15) 불교를 공인하여 고대 국가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527년(법흥왕 14)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왕이 신하들의 반대를 꺾고 불교를 공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법흥왕 자신도 불교를 숭상하여 529년(법흥왕 16) 살생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으며, 노년에는 출가하여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왕비도 영흥사(永興寺)를 짓고 함께 출가하여 묘법(妙法)이라는 법명을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신라를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체제로 완성시켰다. 이러한 법흥왕 때의 치세로 신라는 국력이 크게 융성하여 이후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법흥왕 때에는 문화도 발달하였는데 《삼국사기》에는 ‘미지악(美知樂)’이라는 악곡이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540년(법흥왕 27) 가을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법흥(法興)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법흥왕이 죽은 뒤에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매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경주시 효현동의 선도산(仙桃山) 기슭에 위치한 법흥왕릉은 사적 176호로 지정되어 있다.

법흥왕에게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으며 딸을 동생인 입종 갈문왕(立宗葛文王)에게 시집보냈다는 기록만 전해질 뿐이다. 그래서 그가 죽은 뒤에 외손자이자 조카인 삼맥종[三麥宗, 심맥부(深麥夫)라고도 함]이 왕위를 계승하여 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으로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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