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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신라 왕조 계보

지증왕[ 智證王 ]

by 1티어 율쌤 2022.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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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증왕[ 智證王 ] 

 

신라의 제22대 왕 (재위 500~514). 

성은 김(金), 이름[諱]은 지대로(智大路)이며, 지도로(智度路)나 지철로(智哲老)라고도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지철로왕(智哲老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증(智證)은 시호(諡號)로 신라의 왕들 가운데 처음으로 시호를 사용한 왕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왕호(王號)를 그대로 사용해 《삼국사기》에는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에는 지정마립간(智訂麻立干)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503년(지증왕 4)부터 왕(王)이라는 중국식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의 증손으로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제19대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재위 417~458)의 딸인 조생부인(鳥生夫人) 김씨이다. 지증왕(智證王)이 제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재위 479~500)의 6촌 동생(再從弟)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지증왕의 아버지인 습보갈문왕은 눌지마립간의 동생 가운데 누군가의 아들이 된다. 하지만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지증왕의 아버지가 눌지마립간의 동생인 기보갈문왕(期寶葛文王)이며, 어머니는 눌지마립간의 딸인 오생부인(烏生夫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비에 대해서도 《삼국사기》에는 이찬(伊湌) 등흔(登欣)의 딸인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朴氏)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영제부인(迎帝夫人)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지증왕은 체격이 크고 담력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500년(소지 22) 소지마립간이 아들이 없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당시 나이가 64세였다고 한다. 지증왕의 재위기간에는 5세기 말까지 잦았던 고구려와 왜의 침략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501년(지증왕 2) 백제가 신라의 침입에 대비해 탄현(炭峴)에 목책(木柵)을 설치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지증왕이 즉위한 뒤 신라와 백제의 동맹 관계도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이 시기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정치적 안정을 누리며 통치체제의 정비에 힘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증왕은 502년(지증왕 3) 순장(殉葬)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고, 각 주(州)와 군(郡)의 관리들에게 농사를 권장케 했다. 《삼국사기》에는 이때부터 소를 이용하는 우경(牛耕)이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503년(지증왕 4)에는 나라의 명칭을 ‘신라(新羅)’로 통일하고,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대신해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삼국사기》에는 제15대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재위 298~310) 때에 국호를 ‘신라’라고 정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지증왕 때에 다시 신하들이 이를 건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도 ‘신라’라는 한자식 명칭보다는 ‘사라(斯羅)’나 ‘사로(斯盧)’와 같은 고유어 명칭이 폭넓게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04년(지증왕 5)에는 상복법(喪服法, 상중에 입는 옷에 관한 예법)을 정해서 시행했고, 파리성(波里城)·미실성(彌實城)·진덕성(珍德城)·골화성(骨火城) 등 12개의 성을 쌓았다. 505년(지증왕 6)에는 주(州)·군(郡)·현(縣)의 지방행정체계를 정했으며,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해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임명했다. 그리고 국가에 얼음을 저장하는 기구를 두었으며, 선박의 이용을 제도화하였다. 509년(지증왕 10)에는 금성(金城)에 동시(東市)를 설치했으며, 이를 감독하는 전감(典監) 2인을 두었다. 512년(지증왕 13)에는 울릉도의 우산국(于山國)을 복속시켰고, 514년(지증왕 15)에는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을 설치해 6부와 남쪽 지방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지증왕은 514년(지증왕 15)에 죽었으며, 그의 맏아들인 김원종(金原宗)이 제23대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삼국사기》의 ‘잡지(雜志)’에는 지증왕 때에 시조의 탄생지인 내을(奈乙)에 신궁(神宮)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고 되어 있으나,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이것이 소지마립간 9년(487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지증왕이 음경(陰莖)의 길이가 무려 한 자 다섯 치(一尺五寸)나 되어 배필을 구하기 어려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사자를 보내 배필을 찾게 했는데, 사자가 모량부(牟梁部)에 이르렀을 때 동로수(冬老樹) 아래에서 두 마리의 개가 북(鼓)만큼이나 커다란 똥덩이를 두고 다투는 모습을 목격했다. 마을사람들에게 물어 그 똥의 임자인 모량부 상공(相公)의 딸을 찾아가자 키가 일곱 자 다섯 치(七尺五寸)나 되었다. 사신이 그 사실을 보고하자 왕은 수레를 보내 그녀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왕비로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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