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왕[ 宣德王 ]
신라의 제37대 왕(재위 780∼785).
성은 김(金), 이름은 양상(良相), 시호는 선덕(宣德)이다. 신라의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의 10대손으로, 왕위 계승이 무열왕계에서 내물왕계로 바뀐 신라 하대(下代)의 첫 번째 왕으로 꼽힌다. 해찬(海湌) 김효방(金孝芳)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의 딸인 사소부인(四炤夫人) 김씨이다. 왕위에 오른 뒤에 아버지는 개성대왕(開聖大王), 어머니는 정의태후(貞懿太后)로 봉했다. 각간(角干) 양품(良品)의 딸인 구족부인(具足夫人)을 비로 맞이했는데, 자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구족부인은 아찬(阿湌) 의공(義恭)의 딸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성덕왕 때에 중시(中侍)를 지낸 각간(角干) 김원훈(金元訓)의 손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때에 아찬(阿湌)의 직위에 있다가 764년(경덕왕 23)에 김옹(金邕)의 뒤를 이어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었다. 제36대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 때에는 각간(角干)의 직위에 있으면서 김옹과 함께 성덕대왕 신종(聖德大王神鐘)의 제작을 맡았다. 771년(혜공왕 7)에 만들어진 성덕대왕신종의 명문(銘文)에는 ‘검교사숙정대령 겸 수성부령 검교감은사사(檢校使肅正臺令兼修城府令檢校感恩寺使)’의 직책으로 이름이 등장한다.
774년(혜공왕 10)에는 신유(神猷)의 뒤를 이어 상대등(上大等)이 되었고, 777년(혜공왕 13)에는 혜공왕에게 국정을 극렬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다 780년(혜공왕 16)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찬 김경신(金敬信, 제38대 원성왕)과 함께 이를 진압했다. (김지정의 난) 그리고 반란의 과정에서 혜공왕이 왕비와 함께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는 혜공왕이 난병(亂兵)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선덕왕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적혀 있다.
왕위에 오른 선덕왕은 김경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아찬 의공(義恭)을 시중으로 삼아 국정을 맡겼다. 그리고 대동강 이남 지역의 영토를 적극적으로 경영해 발해의 팽창을 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781년(선덕왕 2) 사신을 보내 패강(浿江, 지금의 대동강) 이남의 주(州)와 군(郡)을 위무했고, 782년(선덕왕 3)에는 직접 한산주(漢山州)를 돌아보고, 예성강과 대동강 사이의 지역인 패강진(浿江鎭)으로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783년(선덕왕 4)에는 아찬 체신(體申)을 예성강 이북의 대곡진(大谷鎭) 군주(軍主)로 파견했다.
선덕왕은 782년(선덕왕 3) 신라 김씨 왕조의 기원과 관련된 시림(始林)의 들판에서 대규모로 군대를 사열하는 등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자 784년(선덕왕 5)에는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신하들의 반대로 계속 왕위에 머무르게 되었으나, 785년(선덕왕 6) 정월 13일에 병으로 사망했다. 선덕왕은 죽으면서 불교의 법식대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뿌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왕릉은 전해지지 않는다. 선덕왕이 죽은 뒤에는 상대등인 김경신이 왕위를 이어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으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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