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공왕[ 惠恭王 ]
신라의 제36대 왕(재위 765∼780).
성은 김(金), 이름은 건운(乾運), 시호는 혜공(惠恭)이다. 무열왕계의 왕위 계승이 이루어진 신라 중대의 마지막 왕으로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의 적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서불한(舒弗邯) 김의충(金義忠)의 딸인 만월부인(滿月夫人) 김씨이다. 이찬(伊湌) 유성(維誠)의 딸인 신보왕후(新寶王后)를 비로 맞이했다가, 뒤에 다시 이찬 김장(金璋)의 딸을 후비로 맞이했다. 자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처음 왕비는 각간(角干) 위정(魏正)의 딸인 신파부인(神巴夫人), 후비는 각간 김장(金將)의 딸인 창창부인(昌昌夫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혜공왕(惠恭王)은 758년 음력 7월 23일에 태어났으며, 760년 음력 7월에 태자로 봉해졌다. 신라의 왕들 가운데 드물게 출생 연도만이 아니라 날짜까지 기록으로 확인되는데, 《삼국유사》에는 혜공왕의 출생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던 경덕왕은 고승(高僧)인 표훈대덕(表訓大德)에게 아들을 얻게 상제(上帝)에게 청해 달라고 말했다. 표훈대덕은 하늘로 올라가 상제를 만나고 내려와 딸은 얻을 수 있지만 아들은 안 된다고 왕에게 전했다. 왕이 딸을 아들로 바꾸게 해 달라고 청하자 표훈대덕은 다시 상제를 만나 아들이 태어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상제는 그렇게 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이 경고대로 원래 여자가 되어야 했으나 남자로 태어난 혜공왕은 어려서부터 여자의 놀이를 즐겼으며 치장하기를 좋아하고 도사들과 어울려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라가 크게 혼란스러워졌다는 것이다.
혜공왕은 765년 여름 경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는데, 당시 나이가 8세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모후인 만월부인 김씨가 섭정을 하였다. 그러나 왕권의 기반이 약해 조정의 중신들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키면서 정치적 불안정이 커졌다. 768년(혜공왕 4)에는 일길찬(一吉湌) 대공(大恭)이 동생인 아찬 대렴(大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33일이나 왕궁이 포위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삼국유사》에는 반란이 음력 7월 3일에 일어나 3개월이나 계속되었으며, 신라 각지의 96각간(角干)이 서로 싸워 큰 혼란이 발생했고, 신성(新城)에 있던 장창(長倉)도 불에 타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768년 겨울, 대공의 반란이 진압된 뒤에 이찬 신유(神猷)와 이찬 김은거(金隱居)가 각각 상대등과 시중의 자리에 올라 국정을 맡았다. 혜공왕은 769년 임해전(臨海殿)에서 신하들을 불러 연회를 열었으며, 그해 여름에는 관리들에게 인재를 천거하게 했다. 그리고 770년(혜공왕 6)에는 직접 서원경(西原京, 지금의 청주)을 돌아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770년 가을 대아찬(大阿湌) 김융(金融)이 다시 반란의 혐의로 처형되었고, 시중이 김은거에서 이찬 정문(正門)으로 바뀌었다. 774년에는 신유를 대신해 이찬 김양상(金良相)이 상대등으로 임명되었고, 775년에는 정문을 대신해 이찬 김순(金順)이 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김은거가 반란을 일으켜 처형된 데 이어 시중이던 정문도 이찬 염상(廉相)과 함께 반란을 꾀하다가 처형되었다. 777년(혜공왕 13)에는 상대등 김양상이 상소를 올려 국정을 극렬히 비판하였고, 김순을 대신해 이찬 김주원(金周元)이 되었다. 혜공왕 때에는 분명한 이유 없이 시중과 상대등의 직위에 있던 인물들이 자주 교체되었을 뿐 아니라, 김은거와 정문 등 그러한 직위를 지낸 인물들이 반란의 혐의로 처형되는 일도 발생했다. 이는 당시 귀족사회 내부에서 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매우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결국 혜공왕은 780년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로 쳐들어왔을 때 왕비와 함께 살해되었다. 그리고 상대등 김양상이 이찬 김경신(金敬信)과 함께 김지정의 반란을 진압하고 혜공왕의 뒤를 이어 신라의 제37대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으로 즉위했다. 《삼국사기》에는 혜공왕이 난병(亂兵)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김양상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적혀 있다. 혜공왕의 장례에 대한 기록도 전해지지 않아, 왕릉의 위치도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혜공왕은 776년 경덕왕 때에 바꾸었던 관직의 명칭을 모두 원래대로 복구했다. 그리고 종묘(宗廟) 제도를 정비해 조부와 부친의 묘와 함께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인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백제와 고구려 평정에 공을 세운 무열왕(武烈王)과 문무왕(文武王)의 묘를 5묘(五廟)로 정해 제사를 지냈다.
《삼국사기》에는 혜공왕에 관해 어려서 왕위에 올랐고 나이가 들어서는 음악과 여색에 빠져 놀러 다니기만 즐겨 사직을 위태롭게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혜공왕이 죽고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라는 제29대 무열왕부터 126년 동안 이어진 무열왕계의 왕위 계승이 끝나고, 내물왕계가 왕위를 잇게 되었다.
'교육정보 > 신라 왕조 계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성왕[ 元聖王 ] (0) | 2022.06.09 |
---|---|
선덕왕[ 宣德王 ] (0) | 2022.06.09 |
경덕왕[ 景德王 ] (0) | 2022.06.09 |
효성왕[ 孝成王 ] (0) | 2022.06.09 |
성덕왕[ 聖德王 ] (0) | 2022.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