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왕[ 孝成王 ]
요약 신라의 제34대 왕(재위 737∼742).
본관은 경주(慶州), 성은 김(金), 이름[諱]은 승경(承慶), 시호(諡號)는 효성(孝成)이다. 신라의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과 소덕왕후(炤德王后) 김씨(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덕왕은 소덕왕후를 왕비로 맞이하기 전에 704년(성덕왕 3) 소판(蘇判) 김원태(金元泰)의 딸인 성정왕후[成貞王后, 엄정(嚴貞)이라고도 한다]와 결혼했으며, 715년(성덕왕 14)에 왕자 김중경(金重慶)을 태자로 삼았다. 하지만 713년(성덕왕 12)에 성정왕후를 궁에서 내보냈으며, 태자 김중경도 717년(성덕왕 16)에 죽었다. 그러자 성덕왕은 720년(성덕왕 19)에 이찬(伊湌) 김순원(金順元)의 딸인 소덕왕후를 새로 왕비로 맞이했으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長子)인 효성왕 김승경(金承慶)을 724년(성덕왕 23)에 태자로 삼았다.
효성왕은 737년(성덕왕 36) 성덕왕이 죽은 뒤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죄수들을 대규모로 사면했으며, 이찬(伊湌) 정종(貞宗)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아찬(阿湌) 의충(義忠)을 중시(中侍)로 임명했다. 효성왕이 즉위한 뒤에 그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사용하는 사정부(司正府)와 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의 승(承) 벼슬의 명칭은 좌(佐)로 바뀌었다.
중국 당(唐)나라의 현종(玄宗, 재위 712~756)은 성덕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738년(효성왕 2)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 형숙(邢璹)을 사신으로 보내 조문을 하며 효성왕을 ‘개부의동삼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으로 봉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당시 사신으로 온 형숙이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등의 문서를 효성왕에게 바쳤으며, 신라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두어 바둑 고수인 병조참군(兵曹叅軍) 양계응(楊季膺)이 부관으로 형숙과 동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효성왕은 형숙에게 황금 30냥과 포 50필, 인삼 1백 근을 선물로 주었다.
739년(효성왕 3) 효성왕은 중시 의충이 죽자 이찬 신충(信忠)을 새로 중시로 임명했다. 그리고 동복아우인 김헌영(金憲英)을 파진찬(波珍湌)으로 임명하고, 곧이어 그를 태자로 삼았다. 이 해에 별궁(別宮)인 선천궁(善天宮)도 완성되었다.
그러나 효성왕 때에는 지배세력 내부의 갈등이 확대되면서 정치가 어지러워졌다. 이를 반영하듯 《삼국사기》의 효성왕 기록에는 여러 가지 변고에 관한 기록이 많이 등장한다. 효성왕이 즉위한 737년에는 지진이 일어나고 유성이 나타났으며, 이듬해에는 소부리군(所夫里郡)의 강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739년(효성왕 3)에는 여우가 월성(月城)에 나타나 울었으며, 740년(효성왕 4)에는 붉은색 옷을 입은 여인이 예교(隸橋) 밑에서 나와 조정을 비방하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742년(효성왕 6)에도 지진이 일어나고 유성이 출현했다.
특히 효성왕의 외조부인 이찬(伊湌) 김순원(金順元)의 권한이 커지면서 정치적 불안이 확대되었는데, 《삼국사기》에는 당나라 현종이 738년 형숙을 사신으로 보내면서 박씨(朴氏)를 왕비로 봉하는 조서를 보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효성왕은 이듬해인 739년(효성왕 3)에 이찬 김순원의 딸인 혜명(惠明)을 새로 왕비로 맞이하였고, 당나라도 740년(효성왕 4)에 사신을 보내 혜명왕후 김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그러나 효성왕은 파진찬(波珍湌) 영종(永宗)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 총애하고 있었는데, 새로 왕비가 된 혜명왕후 김씨는 자신의 친척들과 함께 그녀를 죽이려 모의하였다. 결국 영종은 740년 모반의 혐의로 처형되었다.
효성왕은 742년(효성왕 6)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법류사(法流寺) 남쪽에서 화장되었으며, 유골은 동해에 뿌려졌다. 그리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동복아우인 김헌영이 왕위를 이어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으로 즉위하였다.
한편,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피은(避隐)’ 편 ‘신충괘관(信忠掛冠)’ 조에는 효성왕 때에 중시를 지낸 신충과 효성왕에 관한 일화가 전해진다. 효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궁정의 잣나무 아래에서 신충과 바둑을 두면서 자신이 만약 뒷날 신충을 잊으면 잣나무와 같이 되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뒤에 효성왕은 공신들에게 상을 내리면서 신충을 빠뜨렸다. 신충이 이를 원망하는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이자 나무는 곧바로 노랗게 시들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효성왕이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니 잣나무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이때 신충이 지었다는 노래가 〈원가(怨歌)〉라는 향가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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