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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백제 왕조 계보

성왕[ 聖王 ]

by 1티어 율쌤 2022.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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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聖王 ]

 

성은 부여(扶餘)이며, 이름[諱]은 명농(明穠)이다. 《양서(梁書)》와 《니혼쇼키(日本書紀)》에는 이름이 명(明)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호는 성(聖)이며, 이름을 따서 명왕(明王)이라고도 한다. 《니혼쇼키(日本書紀)》의 일왕 긴메이(欽明) 조에서는 성명왕(聖明王)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제25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생모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왕비에 관한 기록도 전해지지 않으며, 제27대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598) 창(昌), 제28대 혜왕(惠王, 재위 598∼599) 계(季) 등의 자녀가 있었다. 딸 가운데 하나는 신라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의 소비(小妃)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성왕이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을 끊고 맺음에 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523년(무령왕 23) 여름에 부왕인 무령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는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이 ‘성왕(聖王)’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성왕이라는 호칭이 사후에 부여된 시호만이 아니라 생전에 불렸던 것임을 알려준다.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서 인용된 〈미륵불광사사적(彌勒佛光寺事蹟)〉에는 겸익(謙益)이 인도로 건너가 5년 동안 경전을 공부한 뒤 531년(성왕 9)에 산스크리트어로 된 《아비담장(阿毘曇藏)》과 《오부율(五部律)》을 가지고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귀국하자 성왕은 직접 이들을 맞이해 흥륜사(興輪寺)에 머무르게 하고 국내의 이름난 승려 28인을 불러 겸익과 함께 율부(律部) 72권을 번역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겸익이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鼻祖)가 되었는데, 이는 성왕이 왕권 차원에서 불교 교단의 정비에 나섰음을 시사한다. 《삼국사기》에는 541년(성왕 19)에 성왕이 중국 양(梁)나라로 사신을 보내 《시경(詩經)》에 능한 박사와 함께 《열반경(涅槃經)》의 주석서, 공장(工匠), 화사(畵師) 등을 요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 성왕이 왕의 권위를 뒷받침하기 위해 불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성왕이라는 명칭도 왕을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과 동일시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고구려에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 왕권이 약화되고 내분에 시달리던 백제는 무령왕 때에 이르러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고구려에 맞서 점차 세력도 회복해갔다. 성왕도 아버지 무령왕의 뒤를 이어 국가 체제의 정비와 한강 유역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523년(성왕 1) 고구려군이 패수(浿水)에 이르자 성왕은 좌장(左將) 지충(志忠)으로 하여금 1만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이를 막게 했다. 526년에는 웅진성(熊津城)을 보수하고, 사정(沙井)에 책성(柵城)을 세워 국방 체제를 정비했다. 529년에는 고구려 안장왕(安臧王, 재위 519~531)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침공해 혈성(穴城)을 점령하자, 성왕은 좌평(佐平) 연모(燕謨)로 하여금 3만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군을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백제군은 오곡(五谷)의 들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결국 성왕은 538년(성왕 16)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泗沘)로 옮기고 국호도 남부여(南扶餘)로 바꾸어 국가체제를 재정비했다. 이를 기반으로 540년(성왕 18)에는 장군 연회(燕會)로 하여금 고구려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게 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났다.

성왕은 무령왕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 남조(南朝)의 양(梁)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했으며,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525년에는 신라와도 사신을 주고받으며 동맹을 맺었다. 그래서 548년 고구려 양원왕(陽原王, 재위 545~559)이 예(濊)와 함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해오자 신라에 원병을 청해 신라 진흥왕이 장군 주진(朱珍)과 3천의 병력을 보내기도 했다.

550년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점령했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고구려군은 금현성(金峴城)을 공격해왔다. 그러나 이처럼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싸우는 틈을 타서 신라 진흥왕은 이사부(異斯夫)를 보내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았다. 그리고 551년(성왕 29)에는 거칠부(居柒夫) 등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게 해서 10개의 군(郡)을 빼앗았고, 553년(성왕 31)에는 백제의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阿湌) 김무력(金武力)을 그곳의 군주(軍主)로 임명했다. 성왕은 그해 겨울에 딸을 신라 진흥왕과 혼인시키기도 했으나, 이듬해 가을에는 신라를 기습하기 위해 50명의 기병과 보병만 거느리고 구천(狗川)으로 갔다. 《니혼쇼키》에는 신라 관산성(管山城) 공격에 나선 왕자 여창(餘昌)을 위로하러 가던 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왕은 그곳에 매복해 있던 신라군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성왕은 죽은 뒤에 ‘성(聖)’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그의 맏아들인 창(昌)이 제27대 위덕왕으로 왕위를 이었다. 장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왕릉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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