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왕[ 神德王 ]
신라의 제53대 왕(재위 912∼917).
성은 박(朴), 이름은 경휘(景暉)이며 시호는 신덕(神德)이다. 신라의 제8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재위 154~184)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제50대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 때에 대아찬(大阿湌)을 지낸 박예겸(朴乂兼)이며, 어머니는 정화부인(貞和夫人)이다.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의 딸인 의성왕후(義成王后) 김씨를 비로 맞이해 박승영(朴昇英, 제54대 경명왕)과 박위응(朴魏膺, 제55대 경애왕) 등을 낳았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본명은 수종(秀宗)이고 이름은 경휘(景徽)이며, 어머니는 아달라이사금의 후손인 각간(角干) 원홍(元弘)의 손녀이자 성무대왕(成武大王)으로 추봉된 각간 순홍(順弘)의 딸인 진화부인(眞花夫人)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조부는 해간(海干) 문관(文官)이고, 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이간(伊干) 부원[父元, 일부 판본에는 문원(文元)으로 되어 있음]이며, 각간 예겸(銳謙)은 의부(義父)로 뒤에 선성대왕(宣成大王)으로 추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왕비는 자성왕후(資成王后)로 의성(懿成)이나 효자(孝資)라고도 한다고 전하고 있다.
신덕왕은 912년(효공왕 16) 음력 4월에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이 아들이 없이 죽자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이로써 신덕왕과 경명왕, 경애왕으로 이어지는 신라 말기의 박씨 왕조가 시작되었다. 왕위에 오른 신덕왕은 아버지를 선성대왕(宣聖大王)으로 추존하고, 어머니를 정화태후(貞和太后), 왕비를 의성왕후(義成王后)로 봉했다. 그리고 아들인 박승영을 태자로 삼고, 이찬(伊湌) 계강(繼康)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했다.
신덕왕 때에 신라는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세력에 밀려 경주 일대에서만 지배력을 유지할 정도로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911년(효공왕 15) 국호를 태봉(泰封),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던 궁예는 914년(신덕왕 3)에는 연호를 정개(政開)로 고쳤다. 916년(신덕왕 5)에는 견훤이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남 합천)을 공격해왔다.
신덕왕은 917년(신덕왕 6) 음력 7월에 사망했으며, 죽성(竹城)에 매장되었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화장하여 뼈를 잠현(箴峴)의 남쪽에 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적 제219호로 지정된 경주 배동 삼릉(三陵)의 가운데에 위치한 고분이 신덕왕릉으로 전해지기도 하지만 확인되지는 않는다. 신덕왕이 죽은 뒤에는 태자인 박승영이 제54대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으로 왕위를 이었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신덕왕 때에 천재지변이 잇달아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913년(신덕왕 2)에는 음력 4월에 서리가 내리고 지진이 일어났고, 914년(신덕왕 3)에도 음력 3월까지 서리가 내렸다. 915년(신덕왕 4) 음력 6월에는 참포(槧浦)의 물과 동해의 물이 부딪쳐 물결이 20장 높이까지 솟구치는 현상이 3일이나 계속되었다. 916년(신덕왕 5)에는 우레와 같은 굉음을 내며 지진이 일어났다. 《삼국유사》에는 915년 영묘사(靈廟寺) 안의 행랑채에 새들이 몰려들어 까치가 34개의 집을 짓고 까마귀가 40개의 집을 짓는 기이한 일도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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