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공왕 [ 孝恭王 ]
신라의 제52대 왕(재위 897∼912)
성은 김(金), 이름은 요(嶢), 시호는 효공(孝恭)이다.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의 서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 김씨이다. 왕비는 이찬(伊湌) 예겸(乂謙)의 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헌강왕이 사냥을 구경하다가 길가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그녀를 수레에 태우고 와서 행궁(行宮)에서 결합하여 효공왕(孝恭王)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체격이 크고 용모가 뛰어나 이름을 요(嶢)라고 하였으며, 소문을 들은 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이 그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진성여왕은 그의 등에 두 뼈가 솟아 있는 것을 만져보고는 헌강왕의 아들임을 확인했다고 전해진다.
효공왕은 895년(진성여왕 9)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897년(진성여왕 11) 여름에 15세 남짓의 나이로 진성여왕에게서 양위를 물려받았다. 《삼국사기》에는 진성여왕이 측근들에게 자신이 덕이 없어서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덕들이 봉기하므로 어진 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다며 태자인 요에게 선양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효공왕은 즉위한 이듬해에 어머니인 김씨를 의명왕태후로 추존하였으며, 서불한(舒弗邯) 준흥(俊興)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아찬(阿湌) 계강(繼康)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미 신라의 국력이 쇠퇴하고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세력이 커져 있었다. 견훤은 900년(효공왕 4)에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로 도읍을 옮기고 후백제(後百濟)의 왕임을 자칭하고 있었다. 궁예는 898년 패서도(浿西道)와 한산주(漢山州)의 성들을 점령하고 송악(松岳)을 도읍으로 하였으며, 양길(梁吉)의 군대를 물리치고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 전체를 평정하고는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나라이름을 후고구려(後高句麗)라 했다.
이처럼 효공왕의 재위기에 후삼국시대가 본격화하였고, 신라는 끊임없이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공격에 시달렸다. 901년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해왔으며 금성(錦城)의 남쪽을 유린하였다. 905년(효공왕 9)에는 궁예의 군대가 죽령(竹嶺) 동북 지역까지 이르렀다. 907년(효공왕 11)에는 견훤이 일선군(一善郡) 이남 지역의 10여 개 성을 점령하였고, 909년(효공왕 13)에는 궁예가 병선(兵船)을 이끌고 와서 진도군(珍島郡)과 고이도성(皐夷島城)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신라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지방의 성주들에게 함부로 나가서 싸우지 말고 성을 굳게 지키라는 지시만 전달할 뿐이었다. 게다가 효공왕은 애첩에게 빠져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인 은영(殷影)은 왕에게 간언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911년(효공왕 15) 그 첩을 죽여버렸다. 효공왕은 이듬해인 912년(효공왕 16) 여름에 죽었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아달라왕(阿達羅王)의 후손인 대아찬(大阿湌) 박예겸(朴乂兼)의 아들 박경휘(朴景暉)가 왕위를 이어받아 신덕왕(神德王)으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신라 말기 신덕왕에서 경애왕에 이르는 박씨 왕조가 시작되었다.
효공왕은 죽은 뒤에 사자사(師子寺) 북쪽에 묻혔다.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효공왕릉은 사적 제183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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