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명왕[ 景明王 ]
신라의 제54대 왕(재위 917∼924).
성은 박(朴), 이름은 승영(昇英), 시호는 경명(景明)이다. 신라의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재위 912∼917)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의 딸인 의성왕후(義城王后) 김씨(金氏)이다. 신덕왕과 경명왕,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927)으로 이어지는 신라 하대 3명의 박씨왕(朴氏王) 가운데 하나이다. 《삼국사기》에는 왕비와 자녀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지만,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각간(角干) 대존(大尊)의 딸인 장사택(長沙宅)이 왕비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어머니도 자성왕후(資成王后)로 전하고 있다.
912년(신덕왕 원년)에 태자가 되었으며, 917년(신덕왕 6) 가을에 신덕왕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했다. 왕위에 오른 뒤에 동생인 박위응(朴魏膺, 뒷날의 경애왕)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하고, 유렴(裕廉)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당시 신라는 국력이 크게 쇠퇴하여 경주를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을 다스리는 데 지나지 않았고, 궁예(弓裔)의 태봉(泰封)과 견훤(甄萱)의 후백제(後百濟)의 압박에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고 있었다. 918년(경명왕 2) 일길찬(一吉飡) 현승(玄昇)이 반란을 일으켜 신라의 국력은 더욱 약화되었지만, 그해에 왕건(王建)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高麗)를 세우고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阿玆盖)의 투항을 이끌어내 세력을 더욱 확대하였다. 경명왕은 920년(경명왕 4) 사신을 보내 고려와 수교하였으며, 그해 겨울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점령하고 신라를 공격해오자 고려에 원병을 요청해 후백제군을 물러나게 했다. 이듬해 말갈(靺鞨)의 부족인 달고(達姑)의 무리가 북쪽 변경을 공격해왔을 때에도 고려의 도움으로 이를 물리쳤다.
경명왕은 이처럼 고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후백제를 견제했는데, 이 과정에서 후백제와의 갈등을 확대되었고 변경 지역의 장군들도 잇달아 고려로 투항해 국력은 더욱 쇠퇴하였다. 920년 2월, 강주(康州)의 윤웅(閏雄)이 고려로 투항하였고, 922년(경명왕 6)에는 하지성(下枝城)의 원봉(元逢)과 명주(溟州)의 순식(順式), 진보성(眞寶城)의 홍술(洪述)이 고려로 투항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에는 경명왕이 지성(旨城)의 장군 성달(城達)과 경산부(京山府)의 장군 양문(良文) 등에게 명령하여 고려에 항복하게 했다.
경명왕은 중국의 후당(後唐)과의 외교관계를 통해서 국세를 회복시키려고도 하였다. 923년(경명왕 7) 창부시랑(倉部侍郞) 김락(金樂) 등을 후당으로 보냈으며, 이듬해에도 김악(金岳) 등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그해 가을 사망하여 외교적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경명왕은 경주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묻혔으며, 동복동생인 박위응이 55대 경애왕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오늘날 경주 남쪽 배동(拜洞)에 위치한 삼릉(三陵) 가운데 하나가 경명왕의 왕릉이라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사실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따르면, 경명왕은 매사냥을 즐겨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감통편(感通編)’에 수록된 ‘선도성모 수희불사(仙桃聖母 隨喜佛事)’ 이야기에는 경명왕이 사냥을 하던 매를 잃어버리고는 이를 되찾으면 성모(聖母)에게 봉작(封爵)을 내리겠다고 기도하였고, 매가 되돌아오자 성모를 대왕으로 봉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그리고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에는 경명왕 때에 천재지변과 기이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던 벽화 속의 개가 울고, 흙으로 빚은 신상의 활줄이 다 끊어졌으며, 황룡사(皇龍寺) 탑의 그림자가 한 달 동안이나 거꾸로 서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921년(경명왕 5)에는 큰 바람이 불어 도성의 나무가 뽑히고, 메뚜기 떼가 창궐하고 심한 가뭄이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밀양 박씨 세보(世譜) 등에서는 경명왕이 석씨(昔氏)와 결혼하여 밀성대군(密城大君), 고양대군(高陽大君), 속함대군(速咸大君), 죽성대군(竹城大君), 사벌대군(沙伐大君), 완산대군(完山大君), 강남대군(江南大君), 월성대군(月城大君) 등 여덟 아들을 낳았고, 이들이 밀양 박씨와 함양 박씨, 음성 박씨, 죽산 박씨, 고성 박씨, 천안 박씨 등의 시조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기록은 사료에는 존재하지 않고 족보의 기록으로만 존재하고 있어서 경명왕에게 자식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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