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달라이사금[ 阿達羅尼師今 ]
신라의 제8대 왕(재위 154∼184).
성은 박(朴), 이름[諱]은 아달라(阿達羅), 왕호(王號)는 이사금(尼師今)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아달라이질금(阿達羅尼叱今)으로 표기되어 있다. 신라의 제7대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재위 134~154)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모친은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인 박씨(朴氏)이다.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일성이사금의 왕비가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은 키가 7척(尺)이나 되었으며 준수한 풍채와 뛰어난 용모를 지녔다. 그는 제6대 지마이사금의 딸인 내례부인(內禮夫人) 박씨(朴氏)를 왕비로 맞이했다. 아달라이사금에게는 왕위를 계승할 적자(嫡子)가 없었으나, 신라의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재위 912∼917)이 아달라이사금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고려하면 자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154년(일성 21) 부친인 일성이사금이 죽은 뒤에 왕위를 이어받은 아달라이사금은 계원(繼元)을 이찬(伊湌), 흥선(興宣)을 일길찬(一吉湌)으로 임명해 국정을 맡겼다. 그리고 157년(아달라 4) 감물현(甘勿縣,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과 마산현(馬山縣)을 설치하고, 고구려와의 접경인 장령진(長嶺鎭)에 직접 행차하여 병사를 위로하는 등 영토 확장을 위해 노력했다. 162년(아달라 9)에는 왜인의 침략을 방어하는 사도성(沙道城)에 행차해 그곳에 주둔하는 병사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특히 아달라이사금의 재위 기간에 신라는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156년(아달라 3)과 158년(아달라 5)에 계립령(雞立嶺)과 죽령(竹嶺)에 교통로를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백제와의 갈등이 커졌다. 165년(아달라 12) 아찬(阿湌) 길선(吉宣)이 반역을 꾀하다가 발각되자 백제로 도망쳤고, 아달라이사금은 서신을 보내 그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백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아달라이사금은 군대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다. 그 뒤 백제는 167년(아달라 14)과 170년(아달라 17) 신라의 변경 지역을 잇달아 침공해왔다. 특히 167년에는 신라 서쪽 변경의 두 성을 점령해 주민 1천여 명을 붙잡아가기도 했다. 아달라이사금은 흥선으로 하여금 2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케 했으며, 왕 자신도 8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직접 참전했다. 그러자 백제는 붙잡아간 주민들을 돌려보내며 화친을 요구해왔다.
백제와의 갈등은 커졌지만 왜국(倭國)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58년(아달라 5) 왜인이 신라를 예방했으며, 173년(아달라 20)에는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의 여왕인 히미코[卑彌乎]가 사신을 보내왔다. 왜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왕력(王歷)’ 편에도 기록되어 있으나 탈자가 많아서 자세한 내용은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왕과 왕비가 되었다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에 관한 설화도 아달라이사금 4년(157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아달라이사금의 재위 기간에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자주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56년(아달라 3)에는 초여름에 서리가 내렸으며, 160년(아달라 7)에는 폭우로 알천(閼川)이 범람해 홍수 피해가 컸다. 161년(아달라 8)에는 메뚜기 떼가 창궐했고, 바닷물고기가 떼죽음을 했다. 164년(아달라 11)에는 금성에 용이 나타났으며, 170년(아달라 17)에는 금성에 지진이 일어나고 서리와 우박 때문에 농작물 피해가 크게 나타났다. 171년(아달라 18)에는 흉작으로 굶주리는 백성이 많이 발생했다. 172년(아달라 19)에는 전염병이 창궐했으며, 174년(아달라 21)에는 우물과 샘이 모두 마를 정도로 심한 가뭄이 들었다.
아달라이사금은 184년(아달라 31) 봄에 사망했다. 그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제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재위 57∼80)의 손자인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재위 184~196)이 왕위를 이었다. 이렇게 해서 신라의 왕위는 박씨(朴氏)에서 석씨(昔氏)로 넘어갔으며, 제12대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재위 247∼261)까지 석씨의 왕위 계승이 이루어졌다. 아달라이사금의 장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 배리삼릉(拜里三稜) 가운데 하나가 아달라이사금의 묘로 비정되고 있다. 배리삼릉은 1971년에 사적 21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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