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해이사금[ 訖解尼師今 ]
신라의 제16대 왕 (재위 310~356).
성은 석(昔), 이름[諱]는 흘해(訖解), 왕호(王號)는 이사금(尼師今)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걸해이질금(乞解尼叱今)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제10대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재위 196~230)의 아들인 석우로(昔于老)와 제11대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재위 230∼247)의 딸인 명원부인(命元夫人) 석씨(昔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곧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은 내해이사금의 손자이자 조분이사금의 외손자인 셈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흘해이사금이 어려서 몸이 약해 걸음을 걷지 못해 언제나 다른 사람이 안은 채 말에 태워 다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용모가 준수하고 범상치 않았을 뿐 아니라 명민하고 일처리가 남달라서, 아버지인 각간(角干) 우로는 그가 자신의 집안을 흥하게 할 것이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흘해이사금은 310년(기림 13) 외사촌뻘인 제15대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재위 298~310)이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죽은 뒤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신하들이 흘해이사금이 나이는 어려도 늙어서야 이룰 수 있는 덕을 지니고 있다고 의논하여 그를 왕으로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위에 오른 흘해이사금은 급리(急利)를 아찬(阿湌)으로 삼아 국정을 맡기고 내외병마사(內外兵馬事)를 겸하게 했으며, 314년(흘해 5)에는 그를 다시 이찬(伊湌)으로 삼았다.
《삼국유사》에는 흘해이사금 때 백제가 처음 신라를 침공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제8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재위 154∼184) 때인 167년(아달라 14)과 170년(아달라 17)에 이미 백제가 신라의 변경지역을 잇달아 침공해왔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오히려 《삼국사기》에는 흘해이사금 때 신라가 백제로 사신을 보내 예방하며(337년)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백제가 아니라 왜(倭)와 갈등 관계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흘해이사금은 왜국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인 각간 우로가 왜인에게 살해되었고,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재위 262~284) 때에는 어머니인 명원부인 석씨가 남편의 복수를 위해 왜국 사신을 죽여 왜인들이 금성으로 쳐들어오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왜국의 왕이 312년(흘해 3) 사신을 보내 자기 아들을 위해 구혼을 해오자, 흘해이사금은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 하지만 왜국은 344년(흘해 35) 다시 사신을 보내 청혼을 해왔고, 왕은 딸이 이미 출가했다며 이를 거절했다. 결국 왜왕은 이듬해 국교의 단절을 알리는 서신을 보내왔다. 346년(흘해 37) 왜인들은 풍도(風島)로 와서 민가를 약탈하고 금성까지 쳐들어왔다. 신라는 왜인들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방어에만 주력하다 그들이 철수할 때 추격하며 공격해 그들을 패퇴시켰다.
흘해이사금 때 신라에는 천재지변이 자주 닥쳤으나, 왕은 민생(民生)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313년(흘해 4)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창궐하자 흘해이사금은 각지에 사신을 보내 백성을 구휼하게 했다. 이듬해에는 궁궐을 중수했으나 가뭄이 들자 이를 중단했고, 317년(흘해 8)에는 봄과 여름에 가뭄이 심하게 들자 왕이 직접 죄수들을 심사해 많은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가뭄 이후 농업을 복구하기 위해 백성들에 대한 노역을 모두 중단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 밖에 344년(흘해 35) 여름에는 큰 나무가 뽑힐 정도로 심한 태풍이 닥쳤으며, 350년(흘해 41)에도 큰 비가 열흘이나 계속되어 수많은 민가가 물에 잠기고 13곳에서나 산사태가 발생했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한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모두 흘해이사금 때에 백골제(碧骨堤)를 쌓았으며, 둑의 길이가 1천8백보(步)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삼국사기》에는 330년(흘해 21), 《삼국유사》에는 기축년(己丑年)인 329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는데, 벽골제가 위치한 김제(金堤)가 백제의 영토였음을 고려하면 후대에 흘해이사금의 치적으로 윤색되어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삽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흘해이사금은 356년(흘해 47) 여름에 사망했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김씨(金氏)인 미추이사금의 조카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에게 왕위가 계승되었다. 흘해이사금의의 왕비와 자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왕실 간의 결혼을 요청해온 왜왕에게 딸이 이미 시집갔다며 거절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아들은 없었으나 딸은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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