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이사금[ 儒禮尼師今 ]
신라의 제14대 왕 (재위 284∼298)
성은 석(昔), 이름[諱]는 유례(儒禮)이며, 왕호(王號)는 이사금(尼師今)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유례이질금(儒禮尼叱今)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세리지왕(世里智王)이라고도 하고, 이름을 신라의 제3대 왕과 같이 유리(儒理)라고도 한다고 되어 있다. 신라 제11대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재위 230∼247)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왕비인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 석씨(昔氏)의 소생이 아니라 나음갈문왕(奈音葛文王)의 딸 박씨(朴氏)의 소생이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에는 어머니가 ‘○소부인(○召夫人) 박씨’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첫 글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박씨 부인이 밤길을 다가가 별빛이 입으로 들어가 임신을 했으며,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을 낳던 날 저녁에 이상한 향기가 방을 채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례이사금에게는 제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재위 262~284)의 왕비가 된 광명부인(光明夫人) 석씨(昔氏)와 제16대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재위 310~356)의 어머니인 명원부인(命元夫人) 석씨(昔氏), 제15대 기림이사금(基臨泥師今, 재위 298~310)의 아버지인 걸숙(乞淑) 등의 형제와 자매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인 조분이사금은 247년(조분 18)에 사망했으나 맏아들인 유례이사금이 왕위를 잇지 못하고, 숙부인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재위 247∼261)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리고 첨해이사금이 죽은 뒤에는 김씨(金氏)인 미추이사금이 왕위를 계승했고, 유례이사금은 미추이사금이 284년(미추 23) 죽은 뒤에야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왕비나 자녀에 관한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다.
왕위에 오른 유례이사금은 285년(유례 2) 이찬(伊湌) 홍권(弘權)을 서불한(舒弗邯)으로 임명해 국정을 맡겼다. 그리고 291년(유례 8) 미추이사금의 동생이자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의 아버지인 말구(末仇)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았는데, 그는 충직하고 지략이 많아 유례이사금은 그에게 정무에 관해 자주 물었다고 한다.
유례이사금의 재위 기간에 신라는 286년(유례 3) 백제(百濟)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해오면서 오랜 기간 대립해왔던 백제와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왜(倭)의 잦은 침략에 시달렸는데, 왜인들은 287년(유례 4) 일례부(一禮部)를 습격해 불을 지르고 1천 명을 붙잡아갔다. 292년(유례 9)에도 왜인에게 사도성(沙道城)을 점령당했고, 일길찬(一吉湌) 대곡(大谷)을 보내 탈환하였다. 왜인들은 294년(유례 11)에도 장봉성(長峰城)을 공격해왔다. 이처럼 왜인들의 잦은 침략에 시달리자 유례이사금은 295년(유례 12) 백제와 연합해 바다를 건너 왜국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서불한 홍권이 백제와 함께 일을 도모하는 것이 위험하다며 반대해서 계획은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297년(유례 14)에는 이서고국(伊西古國)이 금성(金城)을 쳐들어와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이때 갑자기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병사들이 나타나 적을 물리쳤는데, 그들이 사라진 뒤 미추왕릉에 대나무 잎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 사람들이 미추왕의 도움으로 적을 물리쳤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만이 아니라 《삼국유사》에도 ‘미추왕죽엽군(未鄒王竹葉軍)’ 조에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는 적국의 명칭이 이서국(伊西國)으로 되어 있다.
한편, 290년(유례 7)에는 홍수로 월성(月城)이 무너져서 이를 보수하였다. 유례이사금은 298년(유례 15) 겨울에 죽었으며, 동생인 이찬(伊飡) 걸숙(乞淑)의 아들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재위 298~310)이 왕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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