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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보/신라 왕조 계보

기림이사금[ 基臨王 ]

by 1티어 율쌤 2022.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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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이사금[ 基臨王 ]

신라의 제15대 왕 (재위 298~310).

성은 석(昔), 이름[諱]는 기림(基臨) 혹은 기립(基立)이며, 왕호(王號)는 이사금(尼師今)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기림이질금(基臨尼叱今), 기립왕(基立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이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재위 230∼247)의 손자로 이찬(伊飡) 걸숙(乞淑)의 아들이지만, 걸숙이 조분이사금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조분이사금의 손자가 아니라 증손자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기림이사금이 조분이사금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아이혜부인(阿尔兮夫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경우에는 조분이사금의 적자(嫡子)이자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재위 284∼298)의 동생이 된다. 이 밖에 왕위를 물려받을 아들이 없었다는 내용 말고는 왕비와 자녀에 대한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다.

기림이사금은 성격이 관대하고 온후해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298년(유례 15) 겨울에 유례이사금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299년(기림 2) 장흔(長昕)을 이찬(伊湌)에 임명해 내외병마사(內外兵馬事)를 겸하게 했으며, 300년(기림 3)에는 비열홀(比列忽)과 우두주(牛頭州) 등을 직접 돌아보면서 노인과 가난한 자를 직접 위문하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 곡식을 주었으며 태백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 해에 신라는 왜(倭)와 다시 외교관계를 회복했으며,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주민들도 신라로 투항해왔다.

하지만 기림이사금 때에 신라에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자주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02년(기림 5)에는 봄과 여름에 가뭄이 심하게 들었으며, 304년(기림 7)에는 땅에서 샘물이 솟구치고, 민가가 무너져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로 심한 지진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한편, 307년(기림 10) 기림이사금은 나라이름을 다시 ‘신라(新羅)’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의 ‘지리지(地理志)’에는 혁거세(赫居世) 거서간이 나라를 처음 세웠을 때에는 나라이름을 ‘서야벌(徐耶伐)’이라고 하였는데 ‘사라(斯羅)’나 ‘사로(斯盧)’, ‘신라(新羅)’라고도 했으며, 탈해이사금 때인 65년(탈해 9)에 시림(始林)에서 닭소리가 들리는 괴이한 일이 있어서 ‘계림(鷄林)’으로 바꾸었으나 기림이사금 10년에 다시 신라라는 이름으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新)’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의미이고, ‘라(羅)’는 사방의 백성들을 모두 망라한다는 뜻이며, 기림이사금 때부터 이 명칭을 사용했으나 그것이 지증왕(智證王)과 법흥왕(法興王) 때의 일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전하고 있다.

기림이사금은 310년(기림 13) 여름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제10대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재위 196~230)의 손자이자 조분이사금의 외손자인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재위 310~356)이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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