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이사금[ 味鄒王 ]
신라의 제13대 왕 (재위 262∼ 284).
성은 김(金), 이름은 미추(味鄒), 왕호(王號)는 이사금(尼師今)이다. 미조(味照/未祖)나 미소(味炤/未召)라고도 하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미추이질금(未鄒尼叱今)’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알지(金閼智)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이고, 어머니는 이칠갈문왕(伊柒葛文王)의 딸인 박씨(朴氏)이다. 《삼국유사》에는 이비갈문왕(伊非葛文王)의 딸인 술예부인(述禮夫人) 박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11대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재위 230∼247)과 제12대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재위 247∼261)의 생모인 옥모부인(玉帽夫人) 김씨(金氏)가 구도갈문왕의 딸이므로,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은 이들에게 외삼촌이 되는 셈이다.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의 아버지인 각간(角干) 말구(末仇)는 그의 동생이다.
미추이사금은 조분이사금의 딸 광명부인(光明夫人) 석씨(昔氏)와 결혼해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의 왕비가 되는 보반부인(保反夫人) 김씨와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 재위 402~417)의 왕비가 되는 아류부인(阿留夫人) 김씨를 낳았다. 보반부인은 내례길포부인(內禮吉怖夫人)이라고도 하며, 《삼국유사》에는 내례희부인(內禮希夫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261년(첨해 15) 겨울, 첨해이사금이 아들이 없이 죽자 조분이사금의 외삼촌이자 사위였던 미추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박씨나 석씨가 아닌 김씨로는 처음으로 신라의 왕위에 오른 것이므로 미추이사금은 후대에도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로 숭앙을 받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의 종묘(宗廟) 제도에 관해 제36대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 때에 5묘(五廟)를 제정했는데, 조부와 부친의 묘와 함께 김씨의 시조인 미추이사금, 백제와 고구려 평정에 공을 세운 무열왕(武烈王)과 문무왕(文武王)을 대대로 섬기는 조상으로 삼아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263년(미추 2) 미추이사금은 이찬(伊湌) 양부(良夫)를 서불한(舒弗邯)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內外兵馬事)를 겸하게 했다. 그리고 아버지인 구도를 갈문왕으로 봉했다. 미추이사금은 농민이나 가난한 백성의 구제를 위해 힘썼는데, 264년(미추 3)에는 황산(黃山)을 행차하여 노인이나 가난한 자들을 위문하고 구휼하였다. 그리고 268년(미추 7)에는 가뭄이 들자 5명의 사신을 각지로 보내 백성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살피게 했다. 272년(미추 11)에는 농사에 해로운 일은 모두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고, 276년(미추 15)에는 신하들이 궁궐을 다시 짓자고 청했으나 백성들에게 노역을 시키는 일을 무겁게 여겨 이를 따르지 않았다.
미추이사금 때에도 신라는 백제와 국경을 놓고 자주 대립하였다. 266년(미추 5) 백제가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해왔으나 성주인 직선(直宣)이 이를 패퇴시켰다. 백제는 272년(미추 11)에도 침범해왔으며, 278년(미추 17)에도 신라의 괴곡성(槐谷城)을 공격했다. 왕은 파진찬(彼珍湌) 정원(正源)을 보내 포위된 괴곡성을 구하게 했다. 백제는 283년(미추 22)에도 다시 신라를 침공해 괴곡성을 포위하였으나 왕은 일길찬 양질(良質)을 보내 이들을 물리쳤다. 미추이사금은 284년(미추 23) 봄에 서쪽의 여러 성들을 직접 돌아보며 백제에 대한 방어 체제를 점검했다.
이 시기에도 신라는 왜(倭)와는 우호 관계를 유지했으나, 석우로(昔于老)의 아내가 남편의 복수를 위해 왜의 사신을 불에 태워 죽여서 왜인들이 금성(金城)으로 쳐들어오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추이사금은 284년 겨울에 세상을 떠났고, 죽장릉(竹長陵)이라고도 하는 대릉(大陵)에 매장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는 조분이사금의 맏아들인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재위 284~298)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삼국유사》의 ‘미추왕죽엽군(未鄒王竹葉軍)’ 조에는 그의 능이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시조당(始祖堂)’이라고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유례이사금 때에 이서국(伊西國)이 쳐들어와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갑자기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군사가 나타나 적을 물리쳤으며, 그들이 사라진 뒤에 미추왕릉에 대나무 잎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 사람들이 미추왕의 도움으로 적을 물리쳤음을 알고 그의 왕릉을 ‘죽현릉(竹現陵)’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또한 ‘아도기라(阿道基羅)’ 조에는 고구려 사람인 아도[阿道/我道, 혹은 아두(阿頭)라고도 한다] 화상이 263년(미추 2) 금성의 서쪽마을로 와서 살면서 궁궐로 들어가 불교를 전하기를 청했다는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의 반대로 목숨마저 위협을 받자 아도 화상은 속림(續林)으로 숨었는데, 이듬해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나자 공주의 병을 고쳐 불법(佛法)을 전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아도 화상은 흥륜사를 짓고 불교의 포교에 나섰으나, 미추왕이 죽은 뒤에 사람들이 그를 해치려 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무덤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간 뒤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고, 그 뒤 법흥왕(法興王) 때 다시 공인될 때까지 불교가 쇠퇴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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